이진화의 마음의 두레박

그 한 장의 사진

관리자 2014.04.09 11:45:51

그 한 장의 사진

      

이진화

      

얼마 전 짐정리를 하다가 낡은 앨범에서 흑백사진이 몇 장 떨어졌다. 오래된 사진을 한 장씩 들여다보는데 색다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서너 살 무렵 동래온천이라고 했던가, 고모랑 사촌 언니와 함께 놀러 갔다가 석상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인데 내 옆에는 속눈썹이 길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의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서양인의 얼굴에 소위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양복까지 입은 소년은 그 당시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낯선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내아이가 바로 이웃에 살던 성이 오빠라고 했다. 나보다는 대여섯 살 위로 아버지가 미국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었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성이 오빠는 아이들이 아이노꼬, 튀기(혼혈아)’라고 놀리고 따돌리는 통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린 나를 데리고 놀았다고 한다. 통역 장교였던 아버지께서 그의 양아버지와 친분이 있어서 가족파티에 함께 참석하곤 했는데 내 사촌들과 광안리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에도 그의 모습이 보였다.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진 인물일지라도 사진의 이미지가 강하면 마치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성이 오빠가 그런 존재다. 혼혈아들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 전후 시대를 상징하는 엄연한 현실이었지만 단일민족과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뼈아프게 소외당하는 이들이었다.

 

가끔씩 집안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친숙하지만 비현실적인 존재로 등장하던 그가 생소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은 이십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어떻게 우리 가족을 찾았는지 뜻밖의 전화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약속한 찻집에 나갔더니 삼십대의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미국에 가서 학교를 마쳤다는 그가 의외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다. 미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외할머니와 살았기에 우리말이 익숙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혼혈인들을 위해 일하다 한국여성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어떤 사정 때문인지 다시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인의 정서를 품은 채 지구촌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고 오십년, 삼십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다가 한 세대 만에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 사회에 맞춰서 살라고 동질주의를 강조하던 시절이 가고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다문화주의의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오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초등학교에는 성이 오빠와 같은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무려 십오만 명이나 된다. 그들 중의 대부분이 결혼을 하면서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나라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종교와 정치적 배경이 다른 부모와 살아가는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고 혼란스러울까.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이 흐르고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될 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다문화가정을 코칭하며 관심을 갖는 것은 어린 시절 만났던 성이 오빠나 같은 반에 한두 명 씩 섞여 있던 친구들이 겪었던 아픔을 보며 어찌 할 바를 몰랐던 어릴 적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 일찍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서 느꼈던 낯설음과 불편함, 그리고 지금 세 남동생과 조카들이 외국인으로서 남의 나라 시민이 되어 살아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만나고 있는 아이는 어머니가 중국인이고 아버지가 한국인인 다문화 가정 자녀다. 분명히 학력이나 사회성을 높여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예능 분야에 재능이 뛰어나고 두 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장차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어머니의 아들인 세계적 비올리스트 용재오닐이나 청국장으로 인한 갈등과 소송에서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용이주도하게 증언을 했다던 성이 오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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