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화의 마음의 두레박

남산에서 살살 걷기

관리자 2014.04.08 14:58:28

남산에서 살살 걷기


이진화


올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흑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렸던 십대의 친구들은 머리가 희끗해져도 여전히 친근감이 든다. 동창회에서는 오랫동안 흩어져 살고 있던 친구들을 찾아내고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합창, 합주, 춤과 등산, 스키, 골프 등 운동 동아리를 만들어 그룹 별로 연습을 하고 개교기념일에 발표회를 하기로 했다.

나는 벗들과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댄스 그룹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고 있다. 해보려고 애써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던 운동을 친구들과 하는 것이 즐거워서 매주 연습을 하는 날이 기다려진다.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내가 20세기에 사는지 21세기에 와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다. 매일 일에 쫓기다가도 연습실에 다녀오면 머리가 시원해지고, 스케줄을 조정해가며 건강과 즐거움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습을 열심히 해도 다음날 가면 또 말갛게 잊어버리는 우리들이지만 성심껏 가르쳐주는 동기 무용가 덕분에 조금씩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 요즈음은 의상을 고르고 정하느라 분주한데 패션 감각이 뛰어난 친구들이 평화시장을 오가며 자발적으로 수고를 하는 중이다.

지난 목요일에는 벗들과 남산에서 ‘살살 걷기’를 했다. 국립극장에서 출발하여 목멱산방을 돌아오는 6km 길은 차가 없고 완만하여 살살 걷기에 알맞은 길이다. 그 길을 삼삼오오 이야기 나누며 걷다가 40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마주치면 옛 추억이 떠올라서 박장대소를 했다. 산책길을 돌아내려오다가 내 얼굴을 본 친구는 멈추어 서며 "어머나, 너 0 0 맞지? 그동안 많이 컸구나!" 하며 반가워했다. 중학교 때 앞뒤로 앉아서 매일 도시락을 나눠 먹던 친구의 눈에는 내가 학창시절보다 한결 커 보이는가 보다. 나도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궁금했는데 줄곧 교직에 있다가 작년에 퇴직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걷기를 마치고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향긋한 백련차를 마셨다. 세월이 흘러도 친구들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고 3 때 한 반이었던 친구는 여전히 사려 깊고, 연극반에서 남자 역할을 도맡았던 친구는 변함없이 씩씩했다. 몇 학년 때인지 몰라도 한 교실에서 보내다 40년 만에 만나 미소를 짓는 친구도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동창들과 선생님의 소식을 풍성하게 전해주던 우리 반 대표는 우렁찬 발성으로 출석 체크까지 하여 대화 삼매경에 빠진 친구들을 주목시켰다. 친구들은 며느리 보려면 목소리를 좀 낮춰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그녀는 목소리 큰 시어머니가 화통하다며 일축해버렸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내려오며 장충단 공원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남산과 장충단 공원에 서니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아득하고 멀게 느껴진다. 문득 갈래머리 팔랑대며 키 작은 소녀 하나가 햇빛을 등지고 달려오는 듯 하여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당시 남산 아래 작은 시냇물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우리 동네 친구들은 날씨가 풀리고 나뭇가지 끝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남산의 구석구석을 드나들며 뛰어 놀았다. 녹음이 지면 아카시아 잎을 한 아름 따서 사과 상자 속의 토끼에게 먹이로 넣어 주었다. 토끼들은 굵은 줄기만 빼놓고 토끼장에 꽉 찬 아카시아 잎을 빠른 속도로 먹어치웠다.

원래 조선시대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장충단에 류관순 선배 동상 제막식을 한다고 해서 왔던 기억이 나고, 장충체육관에 농구 경기 응원을 하러 왔던 추억이 새롭다. 그냥 차를 타기가 어쩐지 아쉬워서 충무로, 청계천, 을지로까지 다시 걸었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다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니 그 길에는 전통 시장도 있고 낯설고 신기한 상점들이 많았다. 충무로 대한극장에서는 시험이 끝나는 날마다 단체 관람을 하곤 했었다. 닥터 지바고, 벤허, 산, 멋쟁이와 그 밖에 명화의 잔상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었다.

남산.jpg
살살 걷기를 다녀와서 사진과 함께 글을 카페에 올렸더니 친구들이 ‘너 누구니?’ ‘어디서 나타났니?’ 하며 반겨주었다. 개교기념일 행사를 마치고 나서는 남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학창시절 경주로 수학여행 갈 때의 설렘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살살 걷기로 발동이 걸린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귓가에는 춤을 출 때 맞출 아라비아 풍의 음악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계절의 여왕 5월에 열릴 개교기념일 행사와 여행이 몹시 기다려진다. 나이가 들면 건강, 외모, 재정, 지능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친구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 모든 것 위에 공감대를 가진 우정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