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나무 이야기
The Tale of Three Trees
▪ 시편 42:5 ▪
내영혼아 네가 어찌 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 세 나무 이야기
<세 나무 이야기 The Tale of Three Trees>라는 참으로 멋진 동화가 있습니다. 감람나무(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의 원대한 꿈과 좌절, 그리고 감격을 담고 있는 참으로 의미 있는 동화입니다.
이들 세 나무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겠다는 엄청난 꿈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감람나무, 그러니까 올리브나무는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어 자신의 몸 안에 온갖 보물들을 품고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꾼이 오더니 숲의 그 많은 나무들 가운데 바로 그 감람나무를 베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아름답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베이는 아픔도 잘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집니다. 감람나무는 베어지고 쪼개지고 다듬어지더니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습니다. 모든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암담했습니다. 이제 자신은 가치가 없는 천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망도 없고 꿈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떡갈나무도 나름대로 큰 꿈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왕들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와서 자신을 벨 때만 해도 ‘드디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왕을 싣고 다닐 큰 배가 아니라 조그마한 호수에서나 다닐법한 낚싯배에 불과함을 알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꿈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나무, 높은 산의 꼭대기에 살면서 세상을 내려다 봤던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영원토록 높은 곳에 서 있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자연과 창조섭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그 산 꼭대기에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더니 그만 그 소나무를 쓰러뜨려 버렸습니다. 꿈이 무너진 것입니다. 꿈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얼마 후에 나무꾼이 쓰러져 있는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들 세 나무, 그러니까 감람나무, 떡갈나무, 소나무들은 꿈도 다 사라졌고 자신들의 가치마저도 다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캄캄한 어둠만이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로 호적하러 갔다가 해산할 날이 차서 아이를 낳을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마굿간을 발견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뉘였습니다. 그 구유가 바로 감람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감람나무는, 아름답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어 온갖 보석을 담기 원했던 그 감람나무는 세상의 잡다한 보석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으로 그 감람나무와 함께 한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 키와 지혜가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왕이 타는 큰 배가 아니라 작은 낚싯배를 선택하였습니다. 바로 왕이 타는 큰 배가 되기를 소망했던 떡갈나무로 만든 낚싯배였던 것입니다. 떡갈나무는 세상의 위대한 왕이 아니라 지금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태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떡갈나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몇몇의 로마 병사들이 번개에 맞아 쓰러져서 버려졌던 그 소나무가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아, 이제 땔감 신세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병사들은 버려져 있던 소나무를 두 조각으로 쪼개더니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리시게 된 것입니다. 이 십자가, 그러니까 바로 그 소나무로 만든 십자가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 <세 나무 이야기> 동화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 나무 모두 큰 꿈이 있었지만 그 꿈들은 다 무너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존재 가치가 없는, 그야말로 가치가 다 상실된 존재, 그래서 소망도 없는 어두움의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훨씬 더 어마어마하고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고, 결국 이 나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누구나 무너질 때가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꿉니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빛내는 꿈, 명예를 얻고 재물을 얻는 꿈, 최고가 되는 꿈... 누구나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치 세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펼쳐지는 상황은 그 꿈과 다르게,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감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꿈을 위해 꾸준히 기도해왔고 그 꿈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비전이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친 상황, 그동안 꾸어왔던 꿈과는 너무 다른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좌절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캄캄한 밤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가톨릭계 출판사에서 나오는 월간지인 <생활성서>에 ‘현대 영성가 시리즈’가 있었는데 “카를로 카레토”수도사에 대해 3달에 걸쳐 소개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서원을 한 수도자로서, 사막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그의 삶을 보면서 참 깨달은 것들이 많았는데, 마침 공지영씨의 <즐거운 나의 집>을 읽다 보니까 그 “카를로 카레토” 수사에 대해 딸과 대화형식으로 쓰여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일부분을 조금 길기는 하지만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저자가 있어. 사하라 사막에서 몇 십년째 생활하는 은수자(은둔하면서 수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야. 가진 거라곤 담요 두 장뿐. 그런데 이 분이 새 책을 냈길래 얼마 전에 얼른 사서 읽었어.”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코코가 죽었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꿈은 구조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하는 거였대. 그는 알프스의 마터 호른봉을 등반하며 그 꿈을 다졌대. 그가 말하더구나. 산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고,... 그가 어느 날 친구들하고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 거야. 며칠 고된 여행을 하는데 함께 여행을 하던 친구가 그에게 피곤을 풀어주는 영양제를 허벅지에 놓아 주었대.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이 사람의 다리는 마비되어 버렸고 다시는 두발로 설 수 없게 된 거야. 친구가 실수로 영양제가 아니라 근육을 손상시키는 약을 주사해 버린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엄마가 나를 따라 멈추어 서더니 하늘을 보고 잠깐 허탈하게 웃었다. “그 양반 자기 책에 그 일을 간단하게 세 줄로 썼어. 그 다음 줄에 뭐라고 썼는 줄 아니? 그 뒤로 나는 다시는 산에 오를 수 없었다. 다만 심하게 자책하는 친구를 달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곤 끝이야.”
머리가 아팠다. 이럴 수는 없다고 엄마에게 소리치던 내게, 엄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엄마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어투로 천천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도 아니고... 그게 사람이니? 그런데 나중에 알았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는데 그건 시간이었어. 그 사람이 그 일을 당한 것과 나중에 훌륭한 사막의 은수자가 된 그 사이의 시간, 우리에게는 베일에 싸여있는..., 그러나 그가 온전히 혼자 견디어야 했을 그 시간.”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등산가를 꿈꾸어 왔던 ‘카를로 카레토’에게 한쪽 다리를 못 쓴다는 것은 모든 꿈이 다 무너지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심정을 ‘카를로 카레토’를 소개하는<생활성서>의 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작은 형제회의 수사가 되고파서 아프리카까지 왔는데... 눈보라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면서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싶었는데... 도대체 이 비참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가 웬말인가? 왜 하나님은 이처럼 사소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개입하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왜 하나님은 ...”
여러분! ‘카를로 카레토’수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한 후에 그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그의 영성적 묵상이 「주여, 왜?」라는 책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잃어버리시기보다는 차라리 산산조각을 내고 부서뜨려서라도 구원하고자 하신다.” ,
“우리에게 내일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데 고통보다 더 효과적인 박차는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걷어차신 이유이다.”
3. 인생의 반전 -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
사랑하는 여러분! 카를로 카레토 수사는 허벅지 주사로 다리를 못 쓰게 된 이후로 삶이 바뀝니다. 사막에 은둔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서 기도와 노동과 체험나누기의 삶을 시작하면서 형제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삶의 흔적이 담긴 많은 영성적 저서들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의 영성을 말해주는 글,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는 언제나 베들레헴, 나사렛, 골고다 같은 맨 끄트머리였다. 세도가로 태어나시지 않고 별이 보이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있는 집안 사람이 아니셨다. 손수 노동하여 먹고사셨다. 무슨 이득을 취하려 드시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려 목숨을 빼앗기셨다. 이것이 사랑의 자세다. 저 밑바닥에, 맨 끝자락에 내려앉아서 만족하는 태도이다. 푸코 신부는 예수님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끝자리를 하도 철저하게 고르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에게서 그 자리를 뺏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자리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가는 것뿐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디자인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카를로 카레토 수사에게 있어서 다리를 못 쓰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갖는 인생을 살아가는 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카를로 카레토 수사는 유명한 성인이었던 프란체스코의 활동 지역이었던 아시시에서 가까운 스펠로의 은둔소에서 1988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후반부는 많은 영혼들을 일깨우는 승리의 역사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디자인인 것입니다.
모든 계획이 다 무너지고 소망도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때, 좌절로 인해 캄캄한 어두움이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캄캄한 어둠을 뚫고 부활의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과 시간사이, 시간의 뒤... 그렇게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중에서야... 인생을 많이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아~하!”
5.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시편 42편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일에 대해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지, 이 황망한 일을 통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불안해 합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삶의 장애물들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두려움이라는 대적에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무리 바닥을 쳐다봐도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움만 가득해 집니다. 그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겁니다. 고개를 들어 정상으로, 산꼭대기로 다시 올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4장 17절과 18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쉽게 설명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새 번역 성경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낙심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말씀 시편 42편 5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지금 어떤 일이 우리에게 펼쳐진다 할지라도 그 어두움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과 목적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높이 들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에 집중호우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악천후일지 모르지만 새까맣게 덮여 있는 그 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검은 구름, 먹구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며칠입니다. 그 잠깐의 어두움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내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 높은 담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그 담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넓은 팔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감람나무, 떡갈나무, 소나무의 세 나무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인생에 펼쳐지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 결코 나의 인생 전부가 아닙니다. 인생의 결론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에 머물러 있어도 안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시킬 줄 우리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쓴 약, 독한 맛으로 내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위대하고도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 내실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분, 내 앞에 지금 어떤 그림이 펼쳐져 있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어두운 그림의 뒤에는 밝은 태양이,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올 테면 와 보라!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우리는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과 확신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