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보이는 하나님

- 침묵의 영성-

* 창세기 22:1-19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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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침묵했을까?

 

얼마 전 TV 뉴스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공해가 너무 심해서 밤하늘의 별을 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헤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었습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는 별자리 낭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도심의 간판이나 조명의 빛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하늘의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과천에 과학관이 있습니다만 그 과학관장의 말이 과천에 예고 없는 정전이 한번 쯤 왔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밤이 밤답게 캄캄해져서 하늘의 별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일들이 그저 흘려버릴 그런 일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세상은 온통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소리들만 가득합니다. 배려하고 경청하기보다는 자기 주장들만 가득합니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아우성들이 가득합니다. 자신을 돋보이려는 강력한 외침들만 넘쳐납니다. 마치 도심의 간판들이 더 밝고 더 휘황찬란해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빛들의 외침이 난무하다보니 도심의 밤은 낮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렇게 빛들의 광란이 넘치다보니 진짜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빛들이 그 세상의 찬란함들이 별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별들을 제대로 보려면 빛의 광란이 없는 시골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세상의 빛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 없는 적막함 속에 별빛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서울 하늘, 깊은 밤의 서울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영성의 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 마음에 내 주장만 있고 내 생각들이 워낙 강렬한 빛을 비춤으로 인해 진정 보여야 할 별빛은 보이지 않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 잘난 아우성들로 인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들이 들리지 않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도 캄캄한 산 속 같은 그야말로 세상의 빛이 없는 그 적막함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별을 보려면 등불을 꺼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만나려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들, 자기 중심적 가치관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 광란의 빛들을 다 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들을 다 죽이고 그저 하나님의 빛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침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생각들을 다 죽이고 온전히 하나님의 빛만 바라보고 나아간 신앙의 선배가 있습니다. 그저 온 마음으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 분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 “지금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22)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3절과 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니라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로 번역되어 있지만 새번역 성경을 보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그 귀한 독자 이삭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비록 순종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속의 번민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침묵합니다. 아무 말 없이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자신의 생각이 끼어들 틈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이 전혀 발붙이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은 침묵합니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말 안합니다. 단지 번제를 드릴 준비만 시켰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순간에 왜 침묵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이 그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침묵하는 그 순간,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 있어야 세상의 온갖 생각들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반하는 세상의 잡념들을 떨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침묵 속에서 모리아 산으로 가는 사흘길을 보낸 것입니다.

 

2. 광야와 침묵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스스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광야는 침묵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 침묵을 방해할 세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세상의 광란 같은 빛들이 없기에 아주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도 잘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스스로 광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광야로 갔습니다. 요셉도 감옥이라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여러분, 광야의 삶이란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치유법을 전공한 미국의 예방의학과 여의사인 말로 모건이 맨발로 넉 달 동안 호주의 대 사막을 62명의 참 사람 부족들과 횡단한 기록을 쓴 책이 있습니다. ‘뮤탄트 메시지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어떤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주 속에 일시적인 변덕이나 우연, 무의미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참 사람 부족말로 모건과의 광야 체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말로 모건은 물건이나 자신에 대한 관념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이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걷기 시작한 첫날, 발바닥은 피가 나고 퉁퉁 부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동 중이던 부족의 어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천천히 흔들었습니다. 일행들도 따라합니다. ‘말로 모건은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구요, 정말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 몸짓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몸을 돌리면서 잠깐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우리보다 일찍 떠난 젊은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오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자기가 캥거루 한 마리를 잡았는데 꼬리를 잘라도 되느냐고 묻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들은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잠시 후에 풀렸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이동하는 동안에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로 텔레파시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침묵 가운데서 자연을 통해 들려오는 그야말로 세미한 음성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연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리고 그저 온 자연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로 모건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30나 떨어진 그들 사이에는 침묵 가운데 메시지가 오고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아침에 일찍 출발했던 그 젊은이가 텔레파시를 통해 들었던 그대로 거대한 캥거루를 짊어지고 야영지로 걸어왔습니다.

말로 모건은 그들이 온전한 침묵과 순전한 정직 그리고 욕심 없는 삶을 살기에 텔레파시로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쩌면 광야 같은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 광야 길에서 나의 말이, 나의 생각이 온통 우리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나의 아집과 고집, 나의 주장이 뻣뻣하게 살아있다면 설사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욕심이 내 마음에 가득하다면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호주에 사는 참사람 부족들은 극도의 침묵 가운데서 자기들끼리의 텔레파시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지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그보다도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는 잘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이, 내 영이 침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탐욕의 아우성이 내 안에서 소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쁘다보니까 그 혼란이, 그 광란이 내 영을 먹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참사람 부족들 같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께 묻고 또 그 응답을 듣기 위해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뮤탄트 메시지가 주는 교훈이었습니다.

 

저도 1년여 기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혼자 있는 방에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운동하는 시간 1시간 여를 빼고는 혼자 있었습니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좋은 책들을 보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묵상하며 회개하고 결단합니다.

저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침묵의 영성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TV도 끄고 세상의 온갖 잡념들을 뒤로 하고 그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는 침묵 속의 영적 갈급함, 그를 위해 우리들도 스스로 광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침묵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침묵해야 진정한 순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3. 침묵하게 되면...

 

여러분, 침묵 속에서 사흘 길을 걸어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에게 있어 독자 이삭은 이미 그의 영에서 죽은 존재였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그의 마음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침묵이 이를 반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침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생각 속에서 죽은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침묵의 힘입니다. 침묵의 영성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세상의 온갖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정말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소박한 감동의 마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에 욕심내지 않고 그야말로 소박한 것들에 감동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내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아내 역시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같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누릴 수 있는 감동”...

 

여러분! 침묵하게 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침묵하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진짜 봐야 할 것이 보이고 진짜 들어야 할 것이 들리게 됩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영적 귀가 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영적 소경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침묵은 영적 금식입니다. 앞으로 저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영적금식운동을 자주 하려 합니다. ‘기도의 하루, 침묵의 하루 보내기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 소통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어도 온갖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눈과 눈을 통해, 영과 영을 통해 깊은 교감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러한 영적 교감이 침묵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살아 계실 때 어느 기자가 수녀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님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냥 듣지요.”

그러자 기자가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으실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그분도 그냥 들으십니다.”

 

4. 스스로 광야로 나아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은 침묵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 침묵 안에서 자신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 안에서 하나님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은 세상의 온갖 유혹들, 세상의 온갖 잡념들을 끊을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로새서 3:5)

이렇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아주 좋은 방법이 침묵의 영성이 있는 광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광야로 나아감을 통해 침묵의 영성 가운데 빠져들면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3:10)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저에게 강하게 다가왔던 책망이 네가 하나님의 사람 맞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호수로 내리치는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8:25)고 책망하시듯 말입니다.

어쩌면 저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요즘 어느 이동통신사 광고 중에 나오는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말은 디즈니의 에니메이션 영화 신데렐라에서 나오는 것인데요,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주문을 외우면 무엇이든 생각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데렐라영화에서 등장하는 요정이 먼지 투성이의 신데렐라를 왕자님의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때 사용했던 그 마법의 주문이 바로 이 비비디 바비디 부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 후의 영광을 즐겨하면서도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려 한다고 말합니다만, 신앙은 단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 좀 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얄팍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자신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죽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과거, 내 꿈, 내 소유, ... 그 모든 것들이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진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내면의 깊은 곳까지 처절한 어둠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미한 별빛이 보입니다. 은하수도 보이고, 북극성도, 북두칠성도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서 침묵 가운데 빠져들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본 바와 같이 독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그저 순종했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죽였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습니다. 마음의 광야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안에서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가치관 그 모두가 다 죽은 것입니다. 9절과 10절도 보세요.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 귀한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결박합니다. 그뿐입니까? 이제는 칼을 들고 잡으려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죽고 오직 하나님만 살아 있습니다. 그 마음 가운데 그저 하나님을 향한 안테나만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광야를 걷는 신앙인의 침묵인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복으로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을 다 죽이고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17절과 1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 같이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광야로 나아가 침묵의 영성을 누려보시지 않겠습니까?

 

혼돈의 세상입니다. 세상의 외치는 소리, 탐욕과 정욕과 더러운 소리들이 우리 귀에 가득합니다. 그 소리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도 온갖 세상의 쓰레기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8:25)

이 복잡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침묵의 영성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