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2014.08.10 15:12:23

조금 바보 같을지라도...

창세기 22:1-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 우리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지키려고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손해 본 듯 살자는 것입니다. 살아보니까 그럽디다. 내가 조금 손해 보면 세상이 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내가 조금 손해봐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면 우선 스스로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다툼이 없게 됩니다.

제가 이런 마음을 괜히 갖게 된 게 아닙니다. 저는 31녀 중의 장남입니다. 저야말로 우리 집안의 자랑이고 보배였습니다. 왜냐구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딱 한 가지...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장남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온 가족이 식사를 해도 반찬의 위치부터 장남 중심입니다.

그렇게 항상 장남 중심의 가정에서 살다보니 저도 모르게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나 중심이 몸에 배이게 되고 또 그런 것이 당연한 듯 살아왔습니다. 한 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컸을 때 동생들이 하는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은 충격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빠, 형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다”,

집에 오니까 분명히 고기 굽는 냄새가 났는데 밥상에는 안 올라오더라. 나중에 보니까 오빠가 집에 오니까 혼자 불러다가 먹이더라.”,

나는 항상 형이 입던 옷만 입었지 새 옷 한 번 사 입어 본 적이 없다.”... 등등 끝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는 일도 될 수 있고, 손해를 보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차라리 내가 베풀고 사는 삶을 사는 것이 복이겠구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의 삶의 태도는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그때 가졌던 생각이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편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손해 보면 우선 내 마음도 편하고 남에게 유익을 베풀 수 있다”... 뭐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손해보고 사는 사람들’, ‘남보다 좀 더 고생하면서도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리석다고 말하기도 하고 바보같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고생고생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 자기는 쓰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악착같이 모은 돈 몇 십억을 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세상은 겉으로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참 바보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보니까 참 공감이 갔습니다. 걸핏하면 반에서 20등 밖에 못하는 아이가 성적표를 내밀면서 아빠 몰래 도장 찍어 달라고 할 때 군말없이 아이 요구대로 해 주었던 엄마. “엄마, 누군가는 20등도 하고 꼴등도 해야지 몽땅 일등하면 담임 선생님이 골치 아프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아이 말에 함께 웃어주던 엄마. 야간 자율학습을 하느라고 집에 늦게 오니까 꼭 봐야 할 드라마를 녹화해 달라고 해서 군말 없이 녹화해 주고 아이하고 그 드라마 같이 보면서 함께 낄낄대는 엄마. 그렇게 해 주었다고 해서 동네 아줌마들에게 푼수라는 소리까지 들은 엄마. 아이 과외도 안 시킨다고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엄마. 정말 이 엄마가 바보 같은 여자일까요?

그런데 그 글의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산에 오를 때 천천히 길 옆의 꽃과 풀을 보고 즐기며 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히 앞만 보고 올랐다가 정상에서 환호하고 내려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모두 소중한 삶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 일등을 지키려고 여러 과외 선생을 두고 공부했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엄마의 면회를 거절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엄마는 나더러 정신 차리라고 여러 번 충고했던 엄마입니다. 아이들에게 너무 투자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그 아이는 자라서 엄마의 잔소리만 생각하고, 우리 애들은 엄마를 생각하면 맛있는 음식이 생각난다니 바보엄마가 더 행복한거죠.”

 

여러분!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정말 바보 같다는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인생을 행복하게, 그리고 멋있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쳐다보면 어쩌면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어리석고 바보 같을지도 모릅니다. 남들은 가장 놀기 좋은 시간에 예배드린다고 교회 가지 않나, 쥐꼬리만한 월급 떼어 십일조에다 뭐다 헌금하지 않나.... “기도하면 뭐가 이루어진다고?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라고 콧방귀 뀌면서 바보 같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선배들도 보니까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간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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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보같은 사람, 아브라함

 

창세기 12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b)고 말씀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4).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동안 그런대로 편하게 살아왔던 본토를 떠난다는 것, 그것도 75세에, 그것도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는 곳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무작정 길을 떠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저 그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입니까?

창세기 13장에도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가정이 소유가 많아져서 갈라서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손아랫 사람인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b)

손윗사람인 아브라함이 내가 이곳을 할 테니까 너는 저곳으로 가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입니까? 손해 볼 것을 자초하니 말이지요.

그뿐입니까? 약속의 땅이라고는 하지만 이방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도 없고, 후사를 볼 가능성도 없는 바로 그에게 후손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11:11-12) 아브라함. 요즘 시대의 생각으로 본다면 정말 바보 같지 않습니까?

 

정말로 바보다움의 절정은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아니 아브라함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에게 그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아브라함 같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러한 모습을 보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런 바보 같은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렇게 항상 바보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머리 굴려서 제법 이성적으로’, 나름대로는 슬기롭게 판단한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루기 시작해야 할 당사자 사라에게서는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때 아브라함 부부는 머리를 굴립니다. 제법 이성적으로, 스스로 슬기롭게 대처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애굽 출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뜻한대로 아이를 갖게 될 꿈을 꾸지만 아내 사라와 하갈 사이에 불꽃 튀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갈이 쫓겨 갑니다. 그랬다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다시 집에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지만 분쟁은 계속됩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인 시도는 그건 니 생각이고...”하는 것 같이 그들만의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여기서 잠깐, 정말 바보같은 인물 또 한 사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독자 아들 이삭입니다. 본문 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러분! 이삭이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지고 올라갔다는 것은 그만큼 충분히 성장한 나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지 않습니까? 7절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의 그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삭은 아버지의 말대로 처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번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번제 현장에 도착해보니 번제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삭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제단을 다 쌓기까지 아직도 번제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 번제물이 될 것임을 눈치 채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는 자신을 번제드릴 양을 묶듯이 그렇게 결박합니다. 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저 상상하는 게 아니라 실제 이삭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다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1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런데 여러분! 이삭은 제법 성장한 청년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미 노쇠한 노인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 반항할 생각을 안합니다. 도망갈 생각 조차, 아니 아버지를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쓰기 위해 묶는데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닙니까?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했다고 그저 순종하면서 드리는 아브라함이나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묵묵히 묶여주고 죽음을 기다리는 아들 이삭이나 참으로 바보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붕어빵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다움이 있었기에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약속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따지는 이치로 어찌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어리석음으로 똘똘 뭉친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어리석고 바보 같은일을 통해, 우리가 어리석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슬기로 하나님의 뜻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바보 예수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세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참 바보 같은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40일을 밤낮으로 굶주리신 예수님께 마귀가 유혹합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b).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말씀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지금 주리고 목마른데 그 얼마나 대단한 유혹이었습니까? 그런데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뿐입니까? 한번만 엎드려 경배하면 이 세상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는 마귀에게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딱 한번만 눈감고 엎드리기만 하면 온 세상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 마저도 거절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바보 같은 분 아닙니까?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자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기는커녕 스스로 종이 되시고 호산나, 호산나하는 소리를 들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당하십니다. 그러한 예수를 어찌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바보의 대명사 아닙니까?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꾿꾿하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이요, 정말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삶을 어리석고 바보 같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실패한 인생입니까? 말을 좀 바꿔 보겠습니다. 이 시대에, 성공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답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보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일까요?

4.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 장기려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를 아십니까?

1911년에 태어나서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장기려 박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는 이야기,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문을 열어준 이야기, 며느리가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갖다 주라고 한 일, 책 도둑에게 책 대신 돈을 갖고 가라고 했던 일들이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일화입니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농부는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장박사님을 찾아가 하소연 하였습니다. "모자라는 돈은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어본 장기려 박사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없고 해서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밤에 문을 열어줄 테니."

마치 남의 병원에 와서 큰 인심이나 쓰듯이 장기려 원장은 말했습니다. 농부는 원장의 이 말에 깜짝 놀라 더듬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그럴 수가..."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다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그날 밤 장기려 박사는 서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원하고 난 뒤, 병원의 뒷문을 슬그머니 열어놓았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불 보퉁이를 든 가족과 환자가 머뭇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는 가만히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로 쓰세요. 가서 열심히 일 하시오." 이 말에 농부의 가족은 가슴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습니다.

그때 장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한 번은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이런 처방전을 써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장기려 박사의 이러한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를 이렇게 평합니다. “바보 장기려춘원 이광수 선생도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당신은 바보 아니면 성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에 대한 일화 하나 더 소개합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장박사님이 아끼던 제자 하나가 세배를 올리자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 보거라그러자 그 제자가 재치있게 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되게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니?”

 

여러분! 날마다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기도로 진료를 시작한 그 장기려 박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의술이라는 달란트를 많은 사람들에게 거저 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보로 살기로 작정하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5. 바보로 살아가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정말로 바보 같은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좀 바보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진정으로 믿을 때 어리석고 바보 같아집니다. 믿음이 있어야 바보다움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그저 순종함으로 떠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어리석고 바보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믿어야 순종이 되고 어리석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저에게 자꾸 당신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게 문제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손해도 엄청나게 봤습니다. “다른 사람도 다 내 마음 같겠거니...”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마음에 자꾸 이용당하고 속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세상은 절대 사람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또 그래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제 마음에 불쑥 솟아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의심하고 온전히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목사가 사람을 순전하게 믿지 않는다면,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색안경을 쓰고 의심한다면 그 목사에게서 영성이 제대로 흘러나올까? 평강이 있기나 할까? 그 얼굴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 나올까?”

그래서 다시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 손해를 보더라도 그래도 믿자! 하나님이 나를 믿듯이 나도 사람들을 믿어주자!” 그렇게 사람을 믿는 것이 참으로 바보스러울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어리석고 바보 같아집니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바보 같아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바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드라마 자명고를 봤습니다. 그 잘 나가던 낙랑국이 허무하게 고구려에 무너지게 된 이유는 낙랑국의 태녀가 고구려의 왕자 호동에게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호동의 사랑은 야심이 숨겨진 가식적 사랑이었지만 낙랑국 태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버지가 세운 낙랑국을 멸망케 하였겠습니까? 얼마나 사랑에 눈이 멀었으면 신물(神物)이라고 말하는 자명고를 찢고 동생 자명을 그것도 독을 묻힌 칼로 죽이려 했겠습니까? 원래 사랑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고 그저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바보 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60세가 넘으신 점잖은 분도 아내 앞에서 재롱떨지 않습니까? 부부간에도, 남녀 간에도 사랑하면 그렇게 바보 같아집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속아줍니다. 피해가 올 것을 알면서도 그 피해마저 사랑의 부산물로 여깁니다. 줘도 줘도 아깝지 않은, 그래서 상식적인 손익계산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눈물마저 감미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인간간의 사랑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우리 역시 당연히 어리석고 바보 같아집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굴릴까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데 이럴까 저럴까하는 이성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사랑도 부족하다 보니까 애굽에 간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하면서 혼자라도 살아볼까하는 잔꾀를 부리게 되는 (12, 20)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셔서 사람들끼리 사랑하도록 만든 것은 그러한 삶의 체험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익힘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사랑을 보여 주며, 또 누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6. 조금은 바보로 살아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금은 어리석고 바보같이 살아갑시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바보 같아집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그냥 순종하는 어리석음을 보입시다. 결국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 그렇게 돼야 이 세상이 믿음이 넘치는 세상이 됩니다. 사랑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이 됩니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광야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리석고 바보같이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했던 아브라함 같이 저의 이성과 판단으로 제가 목표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전혀 역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얻은 교훈이 이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말자!”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될지라도 그냥 믿자! 믿고 따르자! 하나님 앞에서 바보가 되자!”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야에서의 생활이 저의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한 Turning Point였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좀 진지(?)하게 말하자면 많이 어리석고 바보 같아지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당부 드립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금은 손해 보며 살아갑시다. 내가 상대방보다 조금 손해 본다는 것은 바로 배려하고 양보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조금은 순진하게 믿으면서 살아갑시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한 번 믿어 봅시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자기네들한테 조금이라도 손해가 있는 듯 하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대들고 할 말 못할 말 다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않고 자신들에게 손해를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까? 홍해의 이적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여러 차례 목격했으면서도 그럴진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저 믿고 그저 순진하게 사랑하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조금 손해 본 듯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바보처럼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것이지요. 나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면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운전하고 있는데 차가 끼어든다고 열 받지 마시고 저 사람이 얼마나 급하면 저럴까하고 양보해 주세요. 이리저리 휘저으며 속력을 내고 가더라도 저 자식....” 하면서 소리지르지 마시고 얼마나 설사가 급했으면 저럴까....” 하면서 넘어가 주세요. 음식을 나눠 먹을 때도 상대방 먼저 들게 하고 내 양은 조금 줄이세요.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내가 조금 더 시간을 쓰세요. 자꾸 머리 굴리지 말고 조금 단순해지세요. 사랑에 눈이 멀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사람을 그저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게 안 되면 모든 게 내 탓이거니 생각하시고 회개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빵의 황제라고 일컫는 김영모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개업을 했는데 개업 한달 만에 갓구운 소보로 빵을 모두 버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보로 빵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균일하고 예쁜 소보로가 얹혀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아내가 울며불며 말렸지만 과감하게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버렸다는 겁니다. 크리스마스 대목에서는 케잌 400 상자를 버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버터크림의 냄새가 약간 났는데 손님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냥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바보다움이 지금의 김영모 과자점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바보같은인생을 살아간 신앙의 선배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의 고아원 사역에서 보여준 참으로 바보같은믿음과 순종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죠지 뮬러를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기도가 전부 응답된 사람

특별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조건 바보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신앙은 머리 굴리는 이성의 신앙이 아니라 그저 순종하는 바보같은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도 바로 소위 말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 ‘슬기’, ‘지식에 의존했을 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지만 그저 하나님 앞에서 바보 같아 졌을 때, 그 바보 같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모리아 산으로 떠날 때 아내에게 묻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판단, 사람들의 평가를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만 바라봤습니다.

세상이 우리더러 뭐라고 말하건 그 세상의 평가에 귀를 닫으시고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어지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케서린 드 휴엑로이터라는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바보들, 특히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제가 정말 감동 깊게 읽었던 뜻밖의 선물이라는 책에 나온 글을 여러분께 소개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따지지 않고, 내 것 챙기려고 남을 이용하는 것 그만 두고, 주어진 은사 가지고 섬기는 기쁨으로 보상받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그게 예수님의 길이요 그게 믿음이 주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길임을 알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깨닫게 된 보물이다. 하나님의 뜻만 이룰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이 나의 기도요 소원이다. 한 송이 이름 없는 들풀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살구나무를 바라보며

추부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