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라’고 말씀하실 때...
‘머무름의 영성’
* 민수기 9장 15-23절 *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1. 살다보면.....
요즘을 ‘Slow Life’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빨리 빨리’에서 ‘천천히 그리고 머무르며’ 살아가는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원래 국민소득이 1-2만 불 시대에는 ‘빨리‘빨리’ 그리고 ‘많이’가 대세를 이루지만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면서부터는 ‘Slow Life’가 확산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개발도상국가의 국민들은 여행을 가더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style로 하지만 소위 잘 사는 선진국 국민들은 여행의 기간도 길기는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자연 속으로 묻혀가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원해서 며칠 머무르기도 하고, 몇 달 간 한적하고 좋은 곳에서 머무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문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타인이나 아니면 특별한 이유에 의해 머무름을 당할 수밖에 없을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가를 되묻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며칠 정도만 머무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무름의 기간이 예상외로 길어지게 될 때 우리는 또 ‘왜?’, ‘무엇 때문에’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이러한 ‘강제적 머무름’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강제적 머무름’이란 ‘신체적 구속’ 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신적 머무름’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어려움과 고난, 위기의 기간이 예상 외로 길어질 때 그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머무름’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 정도의 기간이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합니다. 무너집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머무름’의 위기를 겪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머무름의 위기’에서 어떠한 자세,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로가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다윗도, 요셉도 ‘머무름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무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았기에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과 머무름
오늘 본문도 보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행군을 하는데, 그저 목적지를 향해 빨리 빨리, 부지런히, 쉴 틈도 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구름 기둥이 하늘에서 움직이면 가고, 머무르면 행군도 중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낙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신 8:15, 표준새번역)입니다. 너무나 뜨거워서 구름기둥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 갈 수가 없고 밤에는 반면 너무나도 추워서 불기둥이 있어야만 견딜 수 있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빨리 빨리, 부지런히 쉴 틈도 없이’ 인도하시는 게 아니라 행군하다가도 갑자기 쉬고, 또 한 번 쉬면 몇 날 몇 일이 될 지 모르는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까지 일주일여면 충분히 당도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 직선 코스로 가지도 않고 광야의 길로 접어들게 하신 하나님, 그 광야 길에서도 쉬엄쉬엄, 한마디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행보를 멈추시는 하나님, 광야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1년여에 걸친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유월절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사흘만에 통곡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모세와 이론에게 대들지 않았습니까? 음식이 모자라다고 불평하고 물이 없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역사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급기야는 강이 갈라지는 홍해의 기적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난 지 벌써 1년여가 지났습니다. 여정을 따져 보자면 애굽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출 19:1). 그 다음 해 첫째 달에 두 번째 유월절을 지냅니다(민 9:1) 그리고 둘째 달 20일에야 시내 광야를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민 10:11). 그렇게 1년여를 머무르다 출발하고도 또 가다가 서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
그런데 그렇게 행진하다가 머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시면 가고, ‘머물라’ 하시면 머무릅니다. 22절을 보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아니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머무르게 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머무름 중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광야’라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430여년 간 애굽에서 ‘몸의 지체’가 되어버린 ‘세상적인 때’들을 걷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주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제자훈련의 코스를 하나님의 지휘아래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머무름의 시간이 어찌 보면 괜한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특별히 시내산에서의 1년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1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완성했습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군대 조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군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이기도 하지만 ‘죄악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제자훈련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머무르도록 하시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진하지 않고 머무르는 것에 대해 ‘어리석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더 멀리 더 높이’ 뛰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도약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머물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하는 자세로 ‘행복한 머무름’을 위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저도 ‘머무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머무름의 이유’, ‘머무름의 기간’ ‘머무름의 대한 하나님의 뜻’.... 특별히 다른 의문들은 금방 쉽게 풀렸지만 ‘머무름의 기간’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용납이 되질 않습니다. ‘두어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훨씬 길어지면서 ‘왜?’라는 항변이 좌절과 절망으로 깊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머무름의 기간’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즉각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4형제 중의 장남으로 귀하게 커왔고, 아버지도 저를 최고의 아들로 키워왔기에 학교에서도 항상 제일 앞서가는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항상 머리의 위치에 있었지 꼬리나 몸통이 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는데도 경력사원들 보다 훨씬 우수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바로 ‘내 멋대로’의 머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사회생활에서도 그대로 유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순종’과는 별로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식까지 겹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제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온전한 순종’에 대해 뼈 속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하지요. 그때 깨달은 것이 바로 ‘머무름에도 다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의 차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믿음도 커집니다. 순종이란 참된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주여, 우리가 행복하게 순종하게 하소서”
4.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이스라엘 백성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행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17절 상반절을 봅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하반절을 보면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절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는 것입니다.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구름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모든 행동에 앞서 먼저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병아리 마냥, 닭 마냥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늘을 쳐다본 다음에 뭔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다음에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상당히 저돌적인 면이 있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냅니다. 아예 그 일에 미칩니다. 푹 빠집니다. 문제는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이면 기도는 뒷전이고 ‘해야 할 일’이 눈앞을 가림으로 인해 ‘해야 할 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시련 가운데 머무름의 기간을 가지면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먼저 하늘을 쳐다보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살다보면 많은 순간에 우리는 생각지도 않았던 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상치도 않았던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성공으로 가는 최단의 길’로 포장된 ‘대단한 그 무엇’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엄청난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것으로 보이는 그 무엇도 나에게는 또 다른 ‘벽’,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된 ‘벽’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벽’이 나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그곳에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벽’이든 ‘화려한 벽’이든 그러한 인생의 벽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 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벽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벽은 우리에게 아주 낮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울타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벽이 없는 것처럼 쉽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우리에게 다가온 ‘화려한 벽’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되고, 비록 ‘어두운 벽’이라 할지라도 그 벽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벽’들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하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그 길로 담담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다가온 어떠한 시험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5. 임재와 동행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머물면 이스라엘도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 표시였습니다.
요즘 저는 하늘을 자주 쳐다봅니다. 구름이 있는 하늘도 좋고, 구름 한 점 맑게 갠 하늘도 참 아름답습니다. 아침 해가 뜨는 하늘도 좋고 저녁노을의 하늘도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그래서 파아란 하늘 일색, 그 하늘도 짙기도 하고 옅기도 합니다. 색깔이 다 다릅니다. 특별히 광야같은 사막의 땅에서 구름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짙푸른 하늘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같이 잠시 구경하다가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보이지만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구름 한 점 없다는 것은 “내가 피할 바위”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광야에, 구름이라야 있을 리가 없는 광야에 ‘구름기둥’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이요 임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말은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국립기도원‘에 있던 2009년 여름, 방송에서는 폭염이라, 열대야다 난리를 치지만 저는 참 괜찮은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곳을 지나쳤던 여러 분들이 ’여름을 견뎌나기가 정말 힘들 것‘이라고들 이야기했습니다. 특별히 더위를 잘 타는 저는 그러한 염려에 대해 정말 염려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있는데... 구름기둥으로 지켜 주시겠지....”
시시때때로 내리는 비는 콘크리트 건물, 열로 달궈져 있던 건물들을 식혀 주었습니다. 공기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 여름 같은 해는 없었다고들 말들 합니다. 그때 저는 싱긋 웃습니다.
“구름기둥으로 지켜달라고 내가 기도했거든...”
마치 사도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파산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행 27:25a)고 선포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시편 33편 18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시편 115편 11절도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예레미야 32장 40절 말씀입니다.
6. ‘머물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내 생각대로 가야겠다’, ‘빨리 가야 된다’고 생각될 때 그 행보를 가로막는 벽이 생기면서 ‘여기서 머물라’, ‘여기서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광야의 때요, 고난의 시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머무름’의 순간에 우리가 좌우를 쳐다보면 실망과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벽이 너무 커 보여 ‘다 끝났다’, ‘왜 나는 되는 일이 없는가’라고 한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KBS-TV의 ‘영상앨범-山’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저에게 아주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었습니다.
“거칠고 험한 산길 같은 과정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소중한 인생의 과정이었다.”
“산에 올랐을 때 자욱한 안개가 눈앞을 가렸다.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 힘으로는 안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시나브로 걷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그 험한 광야의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말씀하실 때 ‘행복한 순종’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복한 순종’을 위해 수시로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 거지요. 그 뿐입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습니다.
세상이 바라 볼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이 그야말로 험난한 고생길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광야 여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하나님과의 행복한 동행의 시기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광야생활 40여 년 동안 옷과 신발이 닳거나 해어지지 않는 특별한 복을 누린 게 아니겠습니까?(신 8:4)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여정에서 누렸던 그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그리고 복 주심을 인생의 여정 가운데 풍성히 누리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 Amen!
살구나무를 바라보며
추부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