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상담설교

[상담설교]소유나 존재냐?

관리자 2014.07.03 16:46:39

소유냐, 존재냐?’

마태복음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 “~~자 되세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발언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단서를 단다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부자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자라는 것은 돈이나 물질의 부자뿐만이 아니라 명예나 권세의 부자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질문해도 상당한 비율로 같은 답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소비자의 심리를 꿰뚫고 ~자 되세요!”라는 광고도 나오고 TV에서 쏟아지는 거의 대부분의 광고들도 소유와 관련된 부자로의 갈망을 부추기는, 좀더 엄격히 표현하자면 설혹 아직 부자가 아닐지라도 부자 같이, 부자처럼 보여지게 살아가는 방법을 유혹하거나 충동질하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광고들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우울해 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반면 자신의 내면에 스며든 그 욕구를 향해 돌진해 나아가려는 적극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부자가 나쁘다, 부자는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을 소유해야 합니다. 크리스천 부자들도 많아야 되고, 크리스천 권력자들도 많아야 합니다. 그런 복을 당연히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자, 물론 물질과 명예, 권세를 다 포함하는 부자입니다만, 그 부자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하나의 포장지요, 옷이지 그 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옷이 곧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옷이 고급스럽다고 그 사람까지 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옷이 날개이기 때문에 옷으로 인해 그 사람이 약간 격이 있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 본성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옷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옷은 일시적으로 그 사람의 행동까지 제어하기도 합니다.

우스갯말로 예비군 복을 입혀 놓으면 다 개()가 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도, 인격자도, 괜찮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예비군 복만 입혀 놓으면 아무데서나 다리 벌리고 를 하고, 여자만 지나가면 ~’하면서 휘파람을 분다는 것입니다. 예비군들에게 양복 정장을 입혀 놓고 훈련시킨다면 절대 그런 짓들 안할 것입니다. 그것이 옷이 가지는 효과입니다.

 

그렇게 옷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그 사람의 본성까지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옷으로 인해 그 사람의 행동과 마음이 좌지우지 된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인격이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옷을 다르게 갈아입는다고 그 옷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춤을 춘다면 어찌 그 사람을 성숙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꼭 필요한 옷 외에는 다 벗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과 권세, 명예라는 부자라는 것이 바로 이 옷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옷은 그런 면에서 보면 가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라는 가면, 옷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그 가면의 모습이 본연의 자신 얼굴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면의 모습을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만해지고 교만해지며 진리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되세요!”,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을 때의 모든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2. 솔로몬의 영광

 

여러분!

많은 부모님들에게 묻습니다. “자녀가 어떠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상당수의 부모들이 솔로몬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아예 사지 선다형으로 다윗 요셉 솔로몬 이런 식으로 준다면 한참은 고민할 수도 있지만 답은 거의 100%가 솔로몬으로 굳어질 것입니다. 요셉은 나중에 총리가 되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감옥생활도 하고 고생한 것 때문에, 욥은 부자이기는 하지만 역시 엄청난 고난당한 것 때문에, “.... 다윗이라”, 다윗, 참 좋기는 한데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것을 생각하니까 결국 답은 솔로몬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솔로몬의 성공 스토리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까지 포괄하는 부자 중의 부자입니다. 고생도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세상 모두가 존경하는 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영광중의 영광을 누린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엄청난 솔로몬의 영광이 하찮은 들꽃보다 못하다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왜 솔로몬을 그렇게 부러워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솔로몬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그러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물질, 재산, 권세, 명예, 지혜, 지식,... 이런 것들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 아닙니까?

솔로몬의 인간성, 존재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소유를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한 자가 솔로몬이기 때문에 부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영광이 갖는 실체입니다.

 

결혼을 준비 중인 청춘 남녀가 있습니다. 청년의 평생 소원은 부자다운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 앞에 부잣집 외동딸이 나타났습니다. 그저 그 여자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청년은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 이 청년이 그 자매 자체를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자매의 배경을 사랑한 것일까요?

아마도 청년은 착각할 것입니다. 그 자매 자체까지도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둘러싼 환경을 사랑한 것이라면 그 결혼이 결코 평탄할 수 없습니다. 그 청년이 부를 소유한 순간 얼마든지 아내를 배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 아내가 부를 상실하는 순간 사랑까지도 다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드라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솔로몬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기왕 솔로몬의 영광이 나왔으니까 그 솔로몬의 영광에 가리워진 그림자도 살펴봅시다. 그냥 단편적으로 보면 솔로몬은 아버지 잘 만나서 왕이 되었고, 세계 최고의 부자요, 권력자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뒤 안에는 많은 어두움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어쩌면 성전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20년간이나 지을 때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자식 농사는 한 마디로 완전히 망쳤습니다. 그 아들 르호보암을 보십시오.

열왕기상 12 14절을 보십시오.

....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한 마디로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이 아들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됩니다. 아세라 상을 세우고 성전에서의 혼음도 눈감아 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열왕기상 14 22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결국 르호보암 왕의 유다는 애굽의 바로 시삭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까지 다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꼭 자식 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솔로몬은 말년에 하나님을 떠난 자이기도 합니다(왕상 11).

그뿐 아닙니다. 솔로몬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어겼습니다. 다윗과는 정반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0 26절입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솔로몬이 왜 이렇게 많은 말을 두었습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허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또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어겼습니다.

열왕기상 11 1절과 2절입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이것이 솔로몬의 영광의 실체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재임 초기에만 반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지 나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패역의 길을 간 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 좋은 선입견을 가지면 좋은 점만 골라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좋지 않아 보이는 점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영광만 눈에 들어오지 솔로몬의 영광 뒤에 가려져 있는 어두움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에게 묻습니다. ‘솔로몬같은 남자가 있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최고의 신랑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런 솔로몬하고 결혼하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입니까?

그렇다면 좀 더 솔로몬의 영광 뒤에 가려진 본질을 다시 한 번 보여 드리지요. 솔로몬의 여자가 일천 명이 넘습니다. 자식 농사도 다 망쳤습니다.

잘 나가다가 나중에는 우상을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 이런 솔로몬하고 결혼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꽃의 영광이 더 낫다고 말씀하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3. 들꽃의 영광

 

그렇다면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꽃의 영광이 왜 더 낫다고 하셨을까요?

 

들꽃은 가진 게 없었습니다. 단지 씨앗이라는 생명의 근원 외에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씨가 잎사귀를 내고 드디어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평강을 주고 안식과 쉼을 줍니다. 미소를 만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그 들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꽃이 대단한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꽃 존재 자체로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들꽃은 언젠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다음에 자신의 모든 존재 자체를 다 버리고, 생명의 근원인 씨앗만 남긴 채 사라질 것입니다.

들꽃은 스스로를 잘난 체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꽃들 사이에 다소곳이 묻혀 있습니다. 조화를 이룹니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들꽃의 영광이 갖는 실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에로스(eros)’라는 사랑의 본성을 탐욕적이라고 정리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망이자, 그와 하나 되려고 하는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루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로스의 사랑이 가지는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로스적 사랑을 하면 사랑이 깊어질수록 쓸쓸하고, 다가갈수록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것도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유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고 사랑이라는 마음에 끼게 되면 두 사람이 결코 온전한 하나가 되는 사랑을 할 수 없을 뿐 더러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영광이 갖는 한계인 것입니다. 결국 들꽃의 영광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 4절로부터 7절까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을 메시지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씁니다. 사랑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뽐내지 않으며 자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며 내가 먼저야라고 말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고치꼬치 따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비굴하게 굴 때 즐거워하지 않으며 진리가 꽃피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무슨 일이든지 참으며 하나님을 늘 신뢰하며 언제나 최선을 구하며 뒷걸음질하지 않으며 끝까지 견딥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가페적 사랑이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유대인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소유 중심의 삶의 방식(having Mode)’ 존재 중심의 삶의 방식(Being mode)’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소유에 대한 관심을 뒤로 하고 존재 자체에서 기쁨을 누려야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자체로서의 영광인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서의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지 소유로 덧씌워진 인생을 인생답게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생각해 볼까요?

아까 젊은 청춘 남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감정도 질적(質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덧씌우고 있는 배경, 학벌, 재산, 직업 등 때문에 마음이 쏠린 것이냐, 아니면 그 모든 것보다 그 사람 자체,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서 사랑할 때 소유는 더불어 감사하는 것이 되지만 소유로 인한 사랑은 소유가 존재를 대치함으로 인해 소유의 유무에 따라 사랑의 색깔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음에도 부부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남편이 지금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해주고 직장도 번듯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아내는 남편을 들꽃의 영광같은 존재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지금 솔로몬의 영광같은 소유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들꽃의 영광 같은 존재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존재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스스로 과대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자녀도 존재로서가 아니라 소유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부 잘 하면 예뻐 죽는데 성적이 떨어지면 쳐다만 봐도 열불이 난다?”

이미 소유로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사람을, 사랑을 소유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고대 언어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갖다(have)’라는 동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급속하게 소유를 나타내는 언어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많이 소유했으면서도 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인 정신적인 대상까지도 소유하려 하다보니까 욕구 불충족으로 인한 정신병리적 집착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계속 뭔가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주면서 불행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리히프롬은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누리는 사랑을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정의한 사랑의 개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갖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상대방을 들꽃의 영광의 마음으로 존재 그 자체를 거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5 2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잘 살펴 보십시오. 그 분의 사랑은 인색한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들꽃의 영광으로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게 들꽃의 영광으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들꽃의 영광으로 살아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들꽃의 영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자기 자신을 들꽃의 영광으로 바라보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2 39절을 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들꽃의 영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먼저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재 자체로서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고 들꽃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들꽃 자체로서의 존귀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솔로몬만 쳐다보면서 스스로 한탄하고 자괴합니다. 무너집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자꾸 싼티나는 향수를 뿌려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들꽃 자체로서 갖는 영광을 누리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 자체로서 갖는 영광을 누리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실 때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존재도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길 때 그 위에 덧붙여지는 어떠한 것들도 그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감사는커녕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게 되는 법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스바냐 3 17절입니다.

...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b)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방식입니다. 그저 존재 자체로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 존재 자체로서 열광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시 한 번 들꽃을 생각해봅시다.

장미 백합이라 하는 이름도 없습니다. 무명의 존재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멋진 화분 같은 소유도 없고 명예도 없지만, 남들이 우러러보는 멋진 땅에 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비록 잡초들과 어우러져 피어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존귀하게, 그것도 솔로몬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시나무새.jpg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바로 들꽃 같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꽃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은 결국 민족을 슬프게 만들었지만 들꽃은 마지막에 생명의 근원인 씨앗을 남겼습니다. 마침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후대에 행복한 역사를 남긴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 자체로서 존귀함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과거가 어찌되었건 간에, 무슨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 다 덮어 버리고 그저 존재 자체로서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소유를 바라보지 말고 존재 자체를 귀히 여기는 삶, 그런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들도,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자녀들도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름다운 생명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들꽃의 영광을 누리면 사는 삶!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 귀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추부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