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2014.06.04 15:43:43

당신은 누구시길래

누가복음 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며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하는가 하더라

 

1. 감동을 잃어버린 세대

 

저는 원래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 편입니다. 꼭 할 말만 하고 또 말을 좀 하더라도 사설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 스스로 과묵하다고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하여간 말이 그렇게 많지 않아 다른 이들로 하여금 오히려 범접하기가 어려운 사람으로, 쉽게 말하자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말이 별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가 말을 더 하고 싶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가슴을 다 열어 보일 정도로 말을 많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반응을 잘 해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 그래요?”. “어머, 어쩜”, “정말 그렇겠네요.” “맞아요, 맞아요.” “! 대단하네요.”....

저는 또 손님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직접 요리한 음식도 대접하고 음식을 나누면서 많은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즐겨합니다. 특별히 제가 정말 신이 나서 행복할 때가 언제냐면 음식을 먹으면서 감동과 감탄이 있을 때 그러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음식을 대접하면 맛있다’, ‘잘 먹었다는 평가 받기를 좋아할 것입니다만 특별히 음식을 대하면서 ! 와우, 세상에...”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는 분들을 보면 그저 예뻐 죽는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할 정도로 신이 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상당히 과묵하십니다. 그저 외교적 언어로 아이구, 많이 차리셨네요.”라고 말하고는 잘 먹었습니다.” 정도로 끝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집에서 고생해서 준비하세요? 차라리 여기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고기나 구워 먹으면 될 걸...”

물론 생각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손님을 대접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썩 달갑지 않은 부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음식뿐이겠습니까? 여행을 가더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도 감동할 줄 모르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입이 너무 무거운지 아니면 훨씬 더 좋은 것만 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별거 아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구, 덥다. 집이나 갔으면 좋겠다. 여기는 그늘도 없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한 번 쥐어박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제가 참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감동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서도 감동을 잘 합니다. 멋있는 장면을 보면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환장을 합니다. 감탄사는 물론이고 아예 그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저의 눈 속에 그 자연의 풍광을 담고 또 담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감동받고, 이게 너무 지나치다 보니까 심지어 대중가요 들으면서도 그 가사에 감동받기도 합니다. 가슴이 찡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거위의 꿈얼마나 좋습니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참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즘의 시대가 감동과 감격이 사라져 버렸고, 그러다 보니 삭막함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TV를 봐도 막장드라마가 판을 치고, 귀에 들려오는 음악들도 감동이나 감격과는 거리가 먼 군중을 향한 고독한 외침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봐도 그저 답답한 정치 뉴스가 판을 치고 어두운 소식들로 도배질 되어 있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왜 이 세대가 불행한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질 못하는가? 감동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감동과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그 가슴이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감동과 감격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KOSTA 집회를 갔을 때 가장 은혜 받는 것은 거기에 모인 많은 청년들이 찬양을 드리며 감동과 감격 속에 빠져든다는 점입니다. 찬양을 드릴 때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합니다. 두 눈에서 흐르는 감격의 눈물을 쳐다보면, 보는 제가 또 감동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청년들은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다. “아하! 그래, 맞아, 아멘여기서 말씀드리는 아멘은 기도원에 갔을 때 습관적으로 소리지르는 -”, 그런게 아니구요, 마음 깊은 곳에서 감격하면서 우러나오는, 그래서 묵직하면서 밑으로 깔리는 ~~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여러 교회를 다녀보면 찬양을 드리기는 하는데 그저 금붕어입처럼 뻥긋뻥긋만 하지 그 얼굴 표정을 보면 감격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감동과 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정사역을 하다 보니까 남녀의 심리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고 또 공부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는 남자와 여자가 상대에 대해 어떨 때에 감동하면서 자신의 모두를 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물론 100%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요, 여자가 감동받는 것은 저 남자의 마음이 100% 내 안에, 저 남자가 나를 향해 온 마음이 All-in 되어 있다고 느낄 때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정말 나밖에 모른다고 생각할 때 여자 역시 마음 문을 활짝 엽니다. 여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남자의 눈을 보면 압니다. 말하고 행동할 때 남자의 눈을 보면 여자들은 직감적으로 저 사람이 온전히 내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방 분간해 냅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남자를 보면 여자는 감동받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조금 복잡합니다. 아니 복잡하기 보다는 좀 심플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 쉽습니다. 남자는 감동 잘하는 여자, 감격이 넘치는 여자를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연애할 때, 신혼 초에 왜 남자가 여자에게 온 몸을 던지는 줄 아십니까? 감격과 감동 가운데 빠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야, 정말 맛있다”, “, 너무 좋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데가 있었어?”, “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자기하고 함께 있으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어!”, “고마워. 이 선물 가슴에 안고 잘 거야!” 이렇게 말하는 여자에게 사랑을 주고 싶지 않을 남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피노키오일 것입니다. ‘나무로 만든 남자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보세요. 결혼 3년만 지나도 아내에게서 감동과 감격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구경을 가도 그 여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 햇볕이 너무 강해서 얼굴 상하겠다.”, 맛있는 곳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너무 비싸지 않아? 이거 며칠치 반찬값인데... ”, 둘만 오붓한 시간 보내려 하면 얘들 어떡하고 우리 둘만 가? 집에서 시간 보내자.”....

 

여러분 그러니 감동받고 감격하는 여자를 보면 눈깔이 돌아가는비극적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2.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바로 25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두려워하면서도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제자들은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하시는 이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또 놀라는 것입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그 존재를 생각하면 제자들은 두렵기도 하면서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탄과 찬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말씀을 접하고 접해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조금씩 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길은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날마다의 삶 가운데 만나는 주님을 대하면서, 대하면 대할수록 새롭게 다가오고 또 느껴지는 놀라움, 경탄, 감격, 감동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기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생활 기간이 오래 되어 가면서 남편과 아내 가운데 감격과 감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형식적인 신앙생활, 재미없는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참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같은 놀라움과 감격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감동과 감격이 사라진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종교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그렇게 즐겁습니다. 신이 납니다. 감탄과 감동이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동과 감격, 놀라움의 마음이 살아나니까 다시 제 마음이 촉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짝같은 마음 밭에 습기 먹은 흙들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제 마음 가운데 평강이 찾아들고 기쁨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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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앙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요즈음 제 마음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주 물어봅니다. ‘?’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경이로움에 빠집니다. ‘!’ 세상 만물을 보고 신기해합니다. ‘~!’

그 마음에 새겨진 말씀이나 교훈은 마음 밭에 뿌리를 내려 평생을 갑니다. 그래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 오늘은 뭐 하고 지내지, 짜증나네, 지겹네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또다시 찾아온 새 아침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다가올 하루를 기대합니다. 아예 감동받고 놀라고 감격할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세상을 보면서 아버지는 천하무적이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봇 주먹을 가졌으며 불가능이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한 마디로 수퍼 울트라 킹왕짱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자신이 수퍼 울트라 킹왕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 ‘자녀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함을, 아니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독립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겉늙어 보이면 그것은 연구대상이지 정상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이다운 것은 놀라움과 감동,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놀라움과 감동, 감격이 있다는 것은 날마다 세상이 새로움으로 다가올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주실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와 감사를 주실까?”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의도적으로라도 그런 마음으로 아침을 열어야 합니다. 훈련하는 마음으로라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루를 보내면서도 감동과 경탄에 빠질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면서 보내야 합니다. 제가 요즘에 참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12, 남자의 자격, 황금어장등입니다. ‘개그콘서트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볼 때 저는 우선 웃을 준비,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봅니다. 그러면 혼자 보면서도 낄낄 대고 웃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거... 작가가 대본에 써줬나?”, “에이, 시시하네....”, “뭐가 좋다고 저러냐? 오버하고 있네.”

여러분, 웃을 준비를 하고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의 방어벽을 다 해체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대하면 내 마음도 조깅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바로 그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의 아침이 새로워지고 찬양의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을 보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주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편 8)”

 

4. 감탄사가 있는 신앙

 

사랑하는 여러분,

심수봉이라는 여자 가수의 노래 가운데 당신은 누구시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다 외울 수는 없지만 첫 소절이 참 인상적입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마음 찾아왔나요?”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내 마음 찾아오셨나요? 그리고 내 마음 이렇게 흔들어 놓으셨나요?”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믿음의 길은 이렇게 놀라움과 감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과 감격 가운데 빠져 들고, 그래야 감사가 충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저는 나이 40이 넘은 김국진이라는 개그맨을 참 좋아합니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말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2% 부족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국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감탄사를 자주 쓰기 때문입니다. 뭡니까? “~

 

신앙생활은 바로 이러한 감탄사가 있어야 마음이 촉촉해질 수 있고 은혜 가운데 빠져 들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용서받은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에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다.”

~!” 그래야 오 놀라운 구세주 내주 예수도 진짜 ! 놀라운...”이라는 감격이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446)

그래야 오 신실하신 주도 마음을 다해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447)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이란 놀라는 것입니다.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사가 흘러 넘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마음입니다. 감사가 사라졌다면 이미 놀라움과 감격은 흔적조차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굳어진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굳어진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라도 놀랄 줄 알아야 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기대감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제자들이 고백했던 경탄과 감탄이, 감격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살구나무를 바라보며

추부길  이사장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주의 사랑은 끝이 없고, 그의 공의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주의 보호는 끝이 없고,

그의 말씀은 풍성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