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바다를 지날 때
◯ 마가복음 4:35-41 ◯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1. 인생이라는 바다
저는 바다를 참 좋아합니다. 몇 시간을 쳐다봐도 지겹지 않습니다. 그저 행복합니다. 그것도 시끌벅적한 여름날의 바다보다는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가을과 겨울의 바다를 좋아합니다. 배를 타는 것도 즐겨합니다. 바다가 주는 포근함 때문에 배에서 그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엄마의 품 같은 넉넉함 가운데 빠져듭니다.
한 번은 남해안의 조그마한 섬으로 선교를 가는데 작은 배가 엄청나게 큰 파도에 2-3m 올라가다가 다시 곤두박질치는 위험천만한 항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이쿠, 어이쿠’하면서도 신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는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은 바다로 인해 먹고 살기도 하지만 바다 때문에 생명을 잃기도 하기 때문에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고즈넉했던 바다가 어느 날은 산더미만한 파도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 저의 아버지는 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선주였던 것입니다. 그 배가 먼 바다로 가서 엄청난 양의 생선을 잡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빈 배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좋은 날씨로 인해 항해가 평안할 때도 있지만 태풍이 불거나 바람이 불면 선원 가족들은 포구에 나와 이제나 저제나 배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기다리는 가슴 졸이는 시간을 맞기도 합니다.
배가 출항할 때는 분명히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가끔은 망망대해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 배는 반드시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귀향 본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인생과도 비슷합니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과 망망대해를 지나가는 항해의 여정은 너무나 흡사합니다. 해가 뜨고 노을이 지는 아름다움과 평안함, 기러기가 함께 함으로 인한 즐거움도 있지만 가끔은 풍랑과 태풍으로 인한 고난도 함께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해하는 사람들 같이 일기예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또 내일의 날씨도 중요하지만 몇 km전방과 후방의 날씨도 아주 유의 깊게 보는 이들이 바로 배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신앙의 자세와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2. 광풍을 만난 제자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갈릴리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갈릴리 바다로 호칭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적 요인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광야에 익숙하다 보니까 광야를 상징하는 단어는 ‘미드바르’, ‘네게브’, ‘아라바’, ‘찌여’, ‘에쉬몬’ 등등 7가지나 되는데 ‘바다’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까 호수(lake)나 바다(sea), 심지어 태평양이나 지중해 같은 ocean도 ‘얌’이라는 한 단어로 표기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얌-하갈릴’이고 지중해는 ‘얌-하티콘’, 사해는 ‘얌-하멜라르’...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갈릴리 호수, 갈릴리 바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조그마한 호수는 결코 아닙니다. 남북의 길이가 21km이고 동서의 길이가 12km이니까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 갈릴리 바다를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건너고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목적지를 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러자 제자들은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순종하여 건너편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하나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제자들이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고자 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 배에는 지금 나와 우리만 탄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의 인생,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장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우리의 인생길을 예정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갈 때 목적지의 좌표를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내가 건너야 할 목적지는 나 스스로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마음대로 행선지를 정합니다. 착각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그 무엇이 바로 목적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말씀하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정하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도 그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37절에 보니까 ‘큰 광풍’이 일어나 파도로 인해 배 안에 물이 가득하여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NIV성경에 보면 “nearly swamped”, ‘거의 잠기게 되었다’라고 상황의 급박함을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 하반절에도 보면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NIV성경에 보니까 “they were in great danger”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엄청난 위기입니다. 제자들이 당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황에도, 그 위기의 상황에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38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여기서 ‘고물’이란 ‘배의 뒷부분’을 말합니다. ‘광풍’이란 ‘미친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로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환절기에 일어나는 엄청난 폭풍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배에 들어온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는데 예수님은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결국 제자들이 깨웁니다. 38절 하반절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은 지금 한 마디로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질책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한데 도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우리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우리가 위기에 빠지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상황이 엄청나게 커 보이니까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바로 곁에 예수님이 보이니까 찾기라도 했지만 우리들은 당장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주님마저 찾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만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찾는다 해도 “예수님,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도대체 뭐 하고 계십니까? 내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불평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3. “잠잠하라, 고요하라!”
제자들의 숨넘어가는 아우성 때문에 결국 예수님도 잠을 깹니다. 그리고 즉각 말씀하십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잠을 깨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나를 깨웠느냐? 왜 그러느냐?” 이런 식으로 묻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으로 모든 상황을 제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외침에 항상 즉각 반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에서 5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건너편 벳세다로 건너가게 하신 다음 기도를 마치시고 바다 위를 걸어 바다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 자식들이 나를 유령이라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저 모양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50절에 보니까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은 바로, 즉각적으로 곧 행동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위기에 빠졌을 때 예수님을 부르면 예수님께서 즉각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상황으로, 가장 적합하게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그야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즉각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40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아이구야, 미안하다. 이 지경이 된 줄 몰랐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까짓 광풍을 왜 무서워하느냐? 왜 두려워하느냐? 너희들이 그런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믿음이 없는 연고로 두려워한 것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씀하셨을까요? 더불어 그 광풍이 부는데도 왜 예수님은 편하게 그냥 주무셨을까요? 감각이 둔해서 그랬을까요? 한 번 잠 가운데 빠지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가 되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4. 온전한 내어맡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제자들이 대혼란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놓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하게 느끼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그 배에, 가라앉을 정도의 물이 차서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는 그 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도 그저 예수님을 깨워서 이 위기의 사실을 알려 드리는데 급급했지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에게 중요한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사명을 감당해 가시는 예수님의 존재, 그 본성에 대해 깜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이적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할 일이 많으신데 겨우 광풍 하나 때문에 배가 침몰하여 이 땅을 떠나시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공동운명체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으면 다 목적이 있고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까지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도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위기에 빠지더라도, 광풍이 일어 곧 죽게 될 것 같은 환난 가운데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는 두려움이 없다고 큰소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행기 타고 가는데 갑자기 기체가 흔들립니다. 갑자기 몇 백 미터 곤두박질치는 듯합니다. 그때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타고 있기 때문에 내 덕분에 이 비행기는 안전한 줄 알아라!” 그게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그 위기 가운데 바로 예수님의 존재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단맞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곤히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무슨 배짱이기에,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렇게 태연하실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때문에 그러하실 수 있었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 땅에 목적이 있으셔서 보내셨는데 이까짓 풍랑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섭리하심이 있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을 내어맡긴 아이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예 눈을 감아 버립니다. 이것이 절대적 신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우선 두려움에 빠집니다. 근심합니다. 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 상반절 말씀 같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닥칠 모든 상황을 어쩌면 염려할 수밖에 없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맡기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디 배짱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담대함을 가집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바다에 잔잔함만 있을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광풍이 불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같이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우리의 인생을 덮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광풍,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릴 것 같은 광풍을 바라보지 말고 내 곁에 함께 계시는, 혹시 주무시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결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랬으니까요.
그 제자들에게, 아직도 인생의 바다에서 광풍을 만나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온전한 내어맡김.”
이는 나의 생명까지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두려움이 없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그 마음에 샬롬이 찾아듭니다. 그 믿음을 다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추부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