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상담설교

염려를 염려하십시오!

관리자 2014.05.15 19:46:30

 

 

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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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염려가 충만한 사람들

 

요즘 날씨를 보면 변덕이 정말 심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릴 듯이 비가 쏟아지는가 싶다가도 그 다음 날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가 개어 있습니다. 새소리도 싱그럽게 들려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문 열어 놓기도 힘들다가도 그 다음 날에는 산들바람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요즘 내리는 국지성 호우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은 참으로 모든 것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지구 온난화는 이 세상에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의 마음속에 더 깊숙이 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날은 내 마음 가운데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내 생각조차도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국지성 호우가 내 마음을 때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우울해지기도 하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내 마음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그 캄캄한 어두움은 순식간에 태양을 가려 버립니다. 마음속에 자욱한 안개는 태양을 희미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실족하게 만듭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미래도, 비전도 그 억수같은 비와 그 짙은 안개 속에 실종되고 맙니다.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 내 믿음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 이것이 나의 영적 수준이구나!” 염려 근심, 걱정이라는 영적 안개와 영적 폭우, 영적 어두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주 자리하는 한 삶의 기쁨이 사라짐은 물론이고 그것들이 태양을 가리듯 하나님마저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탄식하듯이 내뱉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묵상하다가 저만 염려가 충만했던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도 나와 성정이 비슷했구나!”를 깨달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마음의 안개, 마음의 어두움을 벗어났는지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2.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염려증후군

 

성경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 같이 또 염려나 걱정이 충만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라함이 되기 전 아브람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가게 되는데 애굽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아브람의 마음 가운데 안개가 가득히 끼게 됩니다. ‘혹시나하는 염려증후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아내 사라를 보면서 자꾸 혹시, 혹시하는 생각이 충만합니다.

창세기 1211절에 보면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다시 말해서 자신이 보기에 어여쁜 여인인 아내 사래, 지금 70세 정도 되는 아내 사래로 인해 염려가 충만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합니까? 12절과 13절입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혹시증후군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래를 탐낸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면 어쩌나?”하는 염려 속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본토아비 친척 집을 과감하게 털고 일어섰던 그 믿음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12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염려의 안개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기억나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닙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네게브 땅으로 옮겨간 아브라함, 이때는 창세기 17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언약도 받고 소돔의 일로 친밀한 대화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하는 염려 증후군은 또 재발합니다.

다시 한 번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게 되고 그랄왕이 사라를 데려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참으로 걱정이 충만한 아브라함입니다. 염려가 충만했던 아브라함은 또 그렇다치고 그런 믿음없는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여 바로 왕에게, 그랄왕에게 순순히 붙들려간 사라도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렇게 염려가 충만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리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염려증후군을 고치시는 방법은 잠시 후에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했던 욥의 염려증후군

 

염려증후군, ‘혹시 증후군에 빠졌던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입니다. 욥은 심리적으로 강박적 혹시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욥기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한 마디로 욥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4절에 보면 아들들의 생일날 잔치가 끝나면 그들을 다 불러다가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생일 당한 사람을 위한 번제만 드린 것이 아니고 아들 일곱의 번제를 드렸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드린 것이 아니라 일곱 차례나 드렸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혹시 자신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자식들을 향한 욥의 염려는 혹시나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저주하였을 지도 모르지라고 염려하였다는 것입니다(가톨릭 성경 번역).

성경은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 NIV성경을 보면 regular custom”, ‘규칙적인 습관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욥의 염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3장에 나옵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1장에 보면 욥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며 종들도 매우 많아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걱정할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완벽하게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욥이 항상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염려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1장의 번제 드리는 모습을 보면 욥의 강박증적 성격이 염려로 그대로 드러나 보입니다.

아마도 욥은 혹시 내가 아프게 되면 어떡하지?”, “혹시 들에 나간 내 아들이 짐승한테 물려 죽으면 어떡하지?”, “혹시 지붕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이런 혹시 혹시 혹시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32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동안 내가 염려했던 것들이,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던 것들이 지금 나에게 현실로 닥쳤구나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염려는 마음을 가립니다. 염려는 생각을 둔하게 만듭니다. 염려는 스스로를 낙심시킵니다. 그래서 염려는 삶을 비합리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4. ?

 

왜 욥이 그러한 염려증후군에 빠져 들었을까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그가 왜 그랬을까요?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기도 하고 언약까지 받았던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염려가 충만했을까요?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뿐만 아니라, 날마다의 삶 가운데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크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객관적인 유형의 믿음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주관적 유형의 믿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11:24)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병이 점점 심해집니다. 그럴수록 남편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아예 아내가 치유되었다고,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결국 아내는 죽습니다. 그럼에도 남편은 그 아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또 기도합니다. 이 남편은 지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관적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내가 간구했던 것을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했으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과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면 그때부터 염려가 생겨납니다. “나의 뜻대로, 내가 간구한 대로,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어떡할까?”하는 혹시증후군, 염려증후군이 그 마음 가운데 안개가 되어 자욱히 퍼지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더 강력한 요구가 되어 하나님을 압박하고 심지어 협박을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달려듭니다.

 

욥은 바로 믿음의 방법, 기도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회개합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을 보면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생각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2절부터 6절을 보면 구구절절 욥이 새롭게 깨달은 점들을 고백합니다. 특히 5절과 6절은 욥의 극적인 깨달음이 잘 드러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5. 염려증후군에서 벗어나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욥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대면하셔서 욥 스스로 깨닫게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염려증후군에서 벗어나도록 직면하셨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명령을 하십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니까 그 귀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이 백세 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식을 얻지 못하자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때가 86세였다고 16절은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71절을 보면 아브람이 구십 구세 때에 ...라고 시점을 명기한 것을 보면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나서 얼마나 좋았던지 무려 13년간이나 그 아들 품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인지라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참다못한 하나님이 13년이나 기다리시다가 직접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1절 후반절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스스로 1절 후반절 같이 소개하신 적이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브람은 아들, 귀한 아들 이스마엘에게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려 13년이 훌쩍 지나버린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그렇게 여겼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이삭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그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준행합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90km 정도 됩니다. 그 거리를 3일만에 당도합니다. 하루에 30km를 걸었으니까 아마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3일 걸어가던 길에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걸 보면 침묵 가운데 그 길을 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수없이 하나님과 교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꿈들, 비전들....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17:4), 아브라함으로 인해 심히 번성하게 될 것이라(17:6)는 말씀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에게 근심과 걱정을 줍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라고 명령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믿고 확신에 거할 때 염려와 근심은 슬그머니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일으키는 비전은 염려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를 사라지게 만드는 첫 번째 길입니다. 요즘 제가 수많은 염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많이 적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꿈을 잃어버리면 푯대가 사라집니다. 그 사라진 틈에 염려가 안개 같이 끼어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비전을 자주 묵상하고 그 비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이라도 행동으로 옮겨가면 안개는 어느덧 개이고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염려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지 말고 행동으로 생각을 바꾸어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만약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며칠간 지체했더라면 반드시 그의 생각 가운데 별 근심과 염려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하질 않았습니다. 사탄이 틈탈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곧 바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 행동, 그 결단으로 인해 염려가 틈타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염려가 찾아들 때 곧바로 결단합니다. 지금 내 마음 가운데 스며든 염려에게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럴 때 바로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셨던 비전을 생각하고 그 비전을 위한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곧바로 시작합니다. 우선 마음에 평강을 달라고 기도한 다음 말씀을 정리한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기도를 소리내서 한다든지, 무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행동을 함으로써 염려의 안개를 걷어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보면, 말로써, 곧 의심이나 염려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말을 함으로써 염려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음을 봅니다. 225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에 뭐라 합니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22:5b)

아브라함은 분명하게 믿음의 말을 합니다. “우리 둘 다 돌아올 것이다

7절에도 보니까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답합니다. 8절입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아브라함은 종들에게 혹시 혼자 올지도 모르겠다”, 또는 아마도같은 걱정의 말, 근심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찾아드는 것은 믿음의 말을 버리고 세상의 말을 하고 스스로 염려의 말로 염려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말로 염려를 물리쳐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믿음의 명령기도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물론 명령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간구하기는 해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온전히 맡길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에는 다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먼저 응답 안 해 주시면 어떡하지?”, “혹시 안 들어 주시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은 안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634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사탄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그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거나 미래에 대해 염려하게 되면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면 마음이 나뉘게 되고, 그래서 번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7절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또 그 믿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끝냈습니다. 단지 번제물만 준비되지 않았을 뿐 입니다. 아브라함은 설마 하나님께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번제드릴 장소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번제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아들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리고 결박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저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언약도 있었지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드리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결단이 염려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지금 내 눈에 보기에는,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염려 같은 안개가 끼어들 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광야생활 가운데 가장 많이 훈련받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기대를 저버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 응답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면 또 근심과 염려가 끼어듭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혹시 증후군’, ‘염려증후군이 습관화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면서도 확신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또 믿음의 언어가 아닌 염려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염려의 쳇바퀴 속에 빠져 들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외식적인 형태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선포를 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염려할 것을 염려하라!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은 염려를 사라지게 하려면 결국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쓸데없는 염려하지 말고 진정으로 의미있는 염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에 대한 모든 근심과 걱정 염려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공중에 나는 새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주님은 반문하십니다. 63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수없이 가슴에 새기는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먼저 마음에 새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염려하게 되면 현재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소홀히 됩니다. 그런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초점의 문제입니다.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본질적인 것들을 마음의 중심에서 제하여 버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버려야 산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고단함, 세상의 정욕들, 세상을 향한 마음들, 내 생각... 보이지 않는 허탄한 마음까지도 버려야 염려하시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재기라는 분은 레몬, 레모네이드를 꿈꾸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염려는 영적 무기력증을 일으킨다. 계속 염려하면 영적 감각을 상실한 채 무력감에 빠질 수가 있다. 염려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염려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해로운 것인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해야 한다.

 

염려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가에 따라 염려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염려의 마음이 들 때마다 회초리를 듭니다. 제 마음을 칩니다. 그리고 염려의 마음을 비우는 적극적인 기도와 선포를 합니다. 더불어 자주 감사의 언어로 저의 마음을 덮어줍니다.

 

원래 감사(thank)는 생각(think)으로부터 온 말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곧 생각만 바꾸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또 반대로 감사를 선포하면 생각이 바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옷을 제 마음에 덮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염려로 인해 영적 무력증에 수없이 빠졌었습니다. 그때마다 감사함으로 나아감으로 인해 영적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같이 노력해 봅시다. 부단히 훈련합시다.

세상의 염려를 버리고 거룩한 염려만 합시다. 고린도전서 732절을 보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부터 마음의 회초리를 우리의 오른 손에 듭시다. 그래서 염려가 일어날 때마다 내 가슴을 칩시다. 그 염려의 자리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을 불어넣읍시다. 그리고 감사로 마음을 덮읍시다.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눕시다. 그게 우선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그 다음에 하나님께 아룁시다.

지금 내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 우선순위가 분명히 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드린 모든 기도에 대한 결과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옷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염려는 자리잡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물어가고 그럼으로 인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추부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