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연 2017.11.01 17:43:09

 

겨자씨와 같은 사람

* 마태복음 13:31-32 *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

 

 겨자씨.jpg

1. 겨자씨의 비유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잘 나타내는 비유가 바로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매우 작았던 그것들이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된다는 그러한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아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확실히 이해를 할 수 있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삶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이 설교가 여러분 모두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가치관을 세우는 주춧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겨자는 2-3월에 노란 십자꽃이 피는 십자화과에 속하는 1-2년생 풀입니다. 원래는 서아시아의 야생초였는데 씨에서 나오는 기름 때문에 널리 재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방에서도 겨자는 기를 통하게 하고 귀를 밝게 하며 안면의 풍을 다스린다고 하여 귀하게 취급합니다. 통닭 튀김을 먹을 때 찍어 먹는 머스타드(mustard) 소스가 바로 이 겨자의 열매로 만든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야생으로 자라는 이 겨자는 검은 겨자(Brassica nirga)와 흰 겨자(Sinapis alba)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겨자는 아마도 검은 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에 나온 그대로 다른 씨들보다도 아주 작다는 것입니다. 32장 첫 부분을 보면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얼마나 작은가하면 검은 겨자는 식물이 매끈하고 잔털이 없는데 한 꼬투리에 5개에서 10개 정도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크기는 1mm정도 밖에 안됩니다. 무게를 보면 더욱 겨자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게 1g은 물 1cc에 해당됩니다. 눈물 두 세 방울이면 1cc, 1g 정도 됩니다. 그런데 겨자씨는 무려 725-760개 정도를 모아야 비로소 1g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작고 가벼운 것인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작은 겨자씨가 2-3m 내외의 사람 키를 약간 넘을 정도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이지요. 그러니까 사실 나무라고 하기보다는 풀이라 해야 옳습니다. 그 정도 되는 키의 풀에 어찌 새가 제대로 깃들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겨자씨는 작다!

 

가장 먼저 겨자씨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 볼 관점이 바로 작다는 점입니다. 그 작은 씨가 나중에는 창대하게 자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겨자씨를 비유로 든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일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도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일은 무시합니다. 큰 일을 해야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새가 깃들 정도의 큰 나무가 되는 것도 사실 겨자씨 같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할 때 바로 그 작은 일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진 아주 작은 하나님의 일이라도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섬기는 아주 작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섬김으로 말미암아 섬김을 받은 그 어린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작은 일을 어찌 별것 아닌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자를 들어 쓰시기도 합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충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작은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쉼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작은 겨자씨이지만 거기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 껍데기를 보고 크다, 작다라고 판단합니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은 보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본질은 자신을 둘러싼 씨의 껍데기가 큰지 작은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할 일만 바라봅니다. 어디에 처해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옥토가 아닐지라도, 아니 도저히 생명이 자라나기 힘든 박토에, 콘크리트 틈새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생명은 결코 자신의 할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스팔트 틈새에서도, 벽돌 사이에 있는 그 틈에서도 생명은 자리를 틀고 싹을 피워냅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씨가 품고 있는 생명은 결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른 씨하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본분에만 열중합니다. 자신의 생명됨에만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어디에 집중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은 보지 않고, 아니 생명력에는 관심조차 두지 아니하고 껍데기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껍데기를 화려하고 남에게 잘 보이도록 만드는 데만 열중하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마음에 상처가 생깁니다. 아픔이 늘어납니다. 그럴수록 껍데기는 두꺼워집니다. 단단해져 갑니다. 그러니 생명이 제대로 움틀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씨의 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씨의 모양이나 색깔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씨가 가진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력이 강하면 어느 곳에 심어도 잘 자라납니다. 나중에는 새가 깃들 정도로 심히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보세요. 그들은 누구하고도 잘 놉니다. 재미있게 놉니다. 어느 곳에 데려다 놓더라도 자기들끼리 신나게 놉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생명의 기운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껍질을 바라보면서 평가하고 비판하고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어린아이라는 본질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가 좋은 것은 교회에 속한 공동체 식구들의 껍질에 대해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고 과거 경력이 어떠했는가를 살펴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건 분명히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지금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 껍질을 소중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생명력을 정말 소중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 중보하는 그러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의 씨앗으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그러한 나무로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작은 씨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만큼은 결코 작은 씨앗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 작은 씨가 나중에는 새가 깃들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고 위로해 주며 격려도 해 줌으로 인해 생명을 품어주고 보듬어주는 그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의 비유가 주는 첫 번째 교훈인 것입니다.

 

3. 겨자씨는 껍데기를 뚫고 나온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씨의 생명력은 반드시 껍데기를 뚫고 나온다는 점입니다. 씨의 생명력은 결코 씨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씨의 껍데기를 뚫고 나옴으로 인해 비로소 생명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껍데기 안에 머물러 있는 그 씨는 결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씨의 껍데기는 단지 생명을 보호하는 갑옷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껍데기가 씨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껍데기는 씨가 생명의 본질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잠시 호위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씨가 본질을 수행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그 씨가 창조주의 사명을 비로소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의 삶에 비유해 봅시다. 껍데기는 나를 둘러싼 여러 종류의 옷들입니다. 학력이란 옷이 될 수도 있고 체면, 명예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둘러싼 껍데기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껍데기들의 궁극적 사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든 생명이 본질이지 껍데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껍데기를 둘러싼 생명의 본질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껍데기란 생명을 위해 다 허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낼 수 있도록 결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소중하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그 겉옷을 벗지 아니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내려놓지 아니하면 그 씨는 결국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공중의 새들에게 다 먹혀 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을 통해 이 땅을 회복시킬 사명도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둘러싼 껍데기는 바로 그 생명을 위해 드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이것을 좀 고차원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다 주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옷들, 그 껍데기가 과연 우리 안의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고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누구를 위해, 무슨 목적으로 이루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껍데기만을 바라보면서 그 껍데기를 포장하는 데만 눈이 멀어 있지는 않습니까?

껍데기만 두꺼워지면 그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이 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생명이 제대로 사명을 다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겉사람이 강하면 속사람이 죽습니다. 겉사람이 단단해지면 속사람은 질식하고야 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면서도 불안하고 근심하고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옷을 벗어버려야 비로소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도 가능해 집니다. 그 안의 생명이 드디어 그 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겉사람이 두꺼워지는 것을 막아주고, 겉사람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의 생명을 바라 볼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생명을 위해 모든 껍데기를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속사람을 성장시키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비로소 천국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겨자씨는 잡초이다!

 

세 번째로, 겨자씨 비유에서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겨자씨의 본질은 잡초라는 것입니다. 겨자나무는 길거리에 널려있는 대표적인 잡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이 사람은 이 잡초인 겨자씨를 자기 작은 밭에 갖다 심었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여기서 은 헬라어로 아그리스 ajgrov"로 작은 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집주위에 잇는 아주 조그마한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채소도 심고 그럴 것입니다. 이 밭을 정원같이 꾸밀 수도 있고 채소 같은 것을 심어 간단히 먹을 것들을 장만하는 그런 곳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밭에는 잡초를 심어서는 안됩니다. 있는 잡초고 다 뽑아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밭에 잡초를 갖다 심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그러니까 잡초에 불과한 겨자씨를 자신의 집 정원에 심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그 밭의 주인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잡초인 겨자씨로 하여금 나중에 자라나 바로 그 곳에 새가 깃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세울 때도 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잡초 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확장되어 나간다는 점입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 서지 않겠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사랑하는 여러분!

잡초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풀입니다. 그렇다고 그 잡초들이 이 땅에 아무런 의미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황대권 씨는 야생초편지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잡초는 없다. 단지 우리가 아직 그 가치를 모를 뿐이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잡초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 몰라주면 또 어떻습니까? 인정해 주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잡초라 할지라도 그 잡초 안에는 생명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그 잡초가 어떠한 결실을 맺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진가를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잡초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겨자씨의 생명력은 새를 깃들게 할 정도로 무성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일 때는 그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보니까 엄청난 진가를 발휘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든 평가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명예를,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잡초같은 인생이라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받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잡초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잡초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면, 그러니까 사람이 잡초인 겨자씨를 택하여 자신의 밭에 심은 것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만 된다면 그 안의 생명력으로 인해 어떠한 결실을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잡초이기 때문에 그 큰 생명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잡초 정신을 불어 넣는 것 같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광야의 시험을 통해 온실 속에서 자라났던 그를 광야의 훈련을 통해 잡초 같은 모세로 변화시켜 나가지 않습니까?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광야의 훈련을 통해 잡초 같은 인생으로 성장시켜 나아간 것입니다. 바로 잡초정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잘 뽑히지도 않습니다. 질깁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련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소명인 열매 맺는 그 날을 위해 모든 것을 이기고 견뎌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더러 세상 사람들이 잡초라 할지라도 괜히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잡초임을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싸움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어떠한 영적 싸움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만 한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잡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시면 됩니다.

나는 잡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밭에 심으신 겨자씨이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5.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라났다!

 

네 번째로는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겨자씨 비유의 핵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법칙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겨자씨 만큼 정도라도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믿음의 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시도록 하면 불가능이 믿음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크기는 비록 아주 조그마하지만 그 안에 든 생명력으로 인해 30, 60,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 역시 새들도 깃들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를 성장시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대로 그대로 두면 됩니다. 내 욕심으로 더 좋은 자리로 옮겨 가려고 뿌리를 뽑아내면 그 나무는 죽습니다. 하나님이 겨자씨를 하나님의 밭에 뿌린 것처럼, 그리고 그 나무를 자라게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밭에 뿌려진 겨자씨이니까 하나님께서 물 주시고 햇빛 주심을 감사하면서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면 반드시 새들도 깃들게 되는 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작은 씨에 너무 위축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것을 보고 우리의 전부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고 보면 압니다.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6. 겨자씨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다섯 번째로 겨자씨는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늘에서 새들이 쉴 수 있게 되었고 나뭇가지에서도 그럴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쩌면 그 새들은 그동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들이 많은 씨들을 쪼아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원수 같은 존재일 수도 있는 그 새들을 겨자나무는 다 품어 줍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이 큰 나무로 성숙시켜 주시는데 덩치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 같은 존재도 다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품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사람까지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숙되어야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고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겨자나무를 보세요.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다 사람들과 짐승같은 동물들을 위한 것입니다. 식용으로, 약용으로 쓰여집니다. 공부해서 남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성숙했다는 것은 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물댄 동산 같아서 그 물을 다 나누어주는 존재, 복의 근원으로서 그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격려 받으며 그 사람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복받은 인생입니까?

돈이 많아야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가 많아야 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겨자씨 같은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믿음만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그 밭에 심음으로 인해 큰 나무로 성숙하게 되고 결국은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그러니까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7. 겨자씨와 같은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여러분!

겨자씨만한 믿음을 다 소유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장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든 생명력으로 인해 나중에 심히 창대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겉모습인 껍데기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생명에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안의 생명력은 얼마나 발휘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생명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생명만 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가칠 것이 없어집니다. 당당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잡초라 그럴지라도 오히려 잡초임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여러분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잡초가 되었음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잡초 같은 신앙인임을 오히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정해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잡초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겨자씨같이 결국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요, 축복의 통로로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자씨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존재였지만 나중에 큰 나무가 된 것 같이 여러분으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회복되는 귀한 역사들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졌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결국에는 큰 나무로 성장하여 이웃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존재가 되었음을 감사함으로 간증하는 여러분 다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살구나무를 바라보며

추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