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2015.05.24 21:37:17


벧엘의 체험

창세기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1. 밤에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참 인상깊게 읽었던 책 가운데 정호승씨의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라는 산문집이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제 가슴에 확 부딪혔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반드시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밤, 이별이라는 밤, 좌절이라는 밤, 가난이라는 밤 등등. 인간의 수만큼이나 밤의 수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밤을 애써 피해 왔습니다. 가능한 한 인생에는 밤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지 않으면 별이 뜨지 않습니다. 별이 뜨지 않는 인생이란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밤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별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밤을 지나지 않고서는 새벽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밤이 없으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에 활짝 피어난 꽃은 어두운 밤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봄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도 겨울이 있었기 때문에 꽃을 피웁니다. 신은 왜 인간으로 하여금 눈동자의 검은자위로만 세상을 보게 했을까요? 눈을 만들 때 흰자위와 검은자위를 동시에 만들어 놓고 말입니다. 그것은 어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뜻이 아닐까요? 어둠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밝음을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별은 대낮에도 하늘에 떠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없기 때문에 그 별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어두운 밤에만 그 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통해서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듯이, 밤하늘이라는 어둠이 있어야만 별을 바라볼 수 있듯이, 고통과 시련이라는 어둠이 있어야만 내 삶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캄캄한 밤, 그것이 비록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일지라도 그 밤이 있어야 별이 뜹니다.

어떻습니까? 조금 긴 문장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인용한 것은 구구절절이 제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깊은 밤에 하늘에 떠 있는 별을 한 번이라도 쳐다 본 사람이라면, 이 글이 주는 의미를 어쩌면 뼈에 사무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야곱도 깊은 밤을 맞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형 에서 대신 받음으로 인해 에서의 분노가 하늘을 찌릅니다. 자칫하다간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 리브가가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자신의 오라버니 라반이 있는 곳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들이 있는 브엘세바에서 라반이 있는 곳, 밧단아람의 하란까지는 무려 837km나 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동안 엄마 치마폭에서만 자라왔던 야곱이 그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별로 챙긴 것도 없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그 먼 길을 갑니다.

그런데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막 출발한 야곱의 여정을 성경은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11a)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이라는 시간대를 내세운 것은 어쩌면 지금 야곱의 모든 상황, 그 심리적 상태도 캄캄한 밤이었음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장자의 축복도 받았지만, 어떻게 보면 야곱이 갈망했던 그 모든 것들을 손에 쥐었지만 야곱의 현실은 지금 해가 쨍쨍 내리쬐는 정오가 아니라 캄캄한 한 밤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야곱의 영적, 심리적 상태는 어둠의 때였다는 것입니다. 캄캄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적막합니다.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다가 머리맡에 두고 잡니다.

성경 본문은 야곱이 베게 삼아 돌을 베었다고 합니다만 이 돌베게는 어쩌면 무서운 짐승이 공격할 때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 적막하고 캄캄한 밤, 지금 무엇하나 소망을 둘 데가 없는 바로 그 때 야곱이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지만 그 홀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야곱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오심을 깨닫는 야곱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기쁘고 감격했던 것이 뭐냐면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캄캄한 어둠에 갇혀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스스로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비록 지금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치듯 먼 타향 길로 가고 있는 야곱이지만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어여삐 여기셔서 캄캄한 심령에 한줄기 빛을 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 어두움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다 떠날지라도, 그래서 정말 심리적으로 곤궁함이 우리를 감쌀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떠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연약할 때, 아무도 의지할 이가 없을 때, 그렇게 광야에 버려진 듯 외롭고 쓸쓸해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야곱에게 그러하신 하나님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찾아 오셨고 저에게, 우리 모두에게, 특별히 캄캄한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시고 위로하시며 복을, 야곱에게 주셨던 그 복을 분명히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문제도 많고 허물도 많은 사람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점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절 첫 부분에 보니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꿈에 본 즉하나님은 야곱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하는 15절의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세상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큰 축복,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을 야곱에게 주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어젯밤의 꿈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야곱이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꿈을 통해, 성경말씀을 통해, 설교 말씀을 통해, 신앙의 선배나 이웃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영적인 귀를 열어 그 하나님의 음성을 아멘하면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마음이 캄캄한 밤중일 때가 마음이 가장 가난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캄캄해야 비로소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캄캄함으로 인해 세상적인 것들, 심지어 내안에 있던 그 모든 잡다함까지도 다 숨겨질 때 그때서야 하늘의 별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일부로 광야로 나가서 그 마음을 캄캄한 어둠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반딧불도 보이고 세미한 하늘의 별들도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했던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16절을 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하나님이 꿈을 통해 주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로 받아들였습니다, 저 멀리서, 아주 먼 곳에 계셔서 텔레파시로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잠을 잤던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함께 하심으로 그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17절을 봅니다. 야곱의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의 이 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신 이 장소,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고 또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때가 구약시대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야곱의 이 생각은 참으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발상입니다. 요즘 흔히 쓰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삶에서 누리는 벧엘의 체험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찬송가 495장을 참 좋아합니다. 그 가사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에 정말 와 닿습니다.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야곱은 그 거친 들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야곱은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벧엘의 체험인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장자의 축복이고 뭐고 자신을 둘러쌓던 모든 가림막들, 스스로를 둘러싼 포장이나 위선들, 그리고 가식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영적으로 다 발가벗겨져서 가난합니다. 바로 그곳으로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그것이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혼이 은총을 입게 되면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하늘나라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간증에서나 듣던 이야기였는데, 내가 벧엘의 체험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곳이 천국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임재 의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비천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이 임하신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곳이 루스가 변하여 벧엘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삭막했고 불안했던 루스, 외롭고 고독했던 루스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벧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야곱이 잠을 잤던 그 거친들, ‘루스가 어느 날 도시로, 멋진 시설로, 멋진 건축물로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대로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딱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바로 야곱의 마음입니다. 야곱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이 변했습니다. 생각이 변했습니다. 생각이 바뀌니까 삶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보세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참 평안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처해 있는 그곳에 하나님도 함께 하심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누리고 찬송을 했던 것입니다. 이 설교를 쓰는 지금, 저도 사도바울이 있었던 그곳에 있습니다. 시간이 다르고 장소도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4. 벧엘의 체험은 날마다 계속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다름아니라 날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의 체험을 한 후에 그 곳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것이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멩이로 기념비를 세웠지만 그것을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의 마음 판에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영원히 잊지 않고, 지금의 그 마음, 임마누엘의 축복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바로 벧엘의 체험, 마음 판에 새겼던 그 기념비는 일생의 푯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브엘세바의 집을 떠나 광야 길을 걸을 때만 해도 혼자였지만 벧엘의 체험을 한 뒤로는 하나님의 동행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삶에 역동성이 생겨납니다.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확신과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임마누엘의 축복이 만사형통의 축복은 아닙니다. 우리가 강물을 지날 때도 있고 바닷물이 우리를 덮쳐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벧엘의 체험이 있어야 하고,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 판에 세운 기념비를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연약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되는 것들이 없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 결심이 흐트러질 때마다 다시 결심하면 됩니다. ‘작심삼일인 사람은 삼일마다 다시 작심하면 되고 작심일일인 사람은 날마다 다시 자신을 추스르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벧엘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천국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음 판에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결단을 하십시오. 서원을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마음 가운데 사탄이 틈을 탈 때마다, 내가 약해지려 할 때마다 그 기념비, 마음 판에 새긴 기념비를 다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벧엘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날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성전 건축 준비를 다 한 다음에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주었던 말씀, 역대상 2216절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이제 일을 시작하여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 (쉬운 성경)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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