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이미 매화가지 머리에 와 있는 것을...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

芒鞋遍踏隴頭雲 [망혜편답농두운]

歸來適過梅花下 [귀래우과매화하]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온종일 봄을 찾아다녔지만 봄을 찾지 못하고, 아득한 좁은 길로 짚신이 다 닳도록 언덕 위 구름 있는 곳까지 두루 헤맨 끝에, 돌아와 마침 매화나무 밑을 지나노라니, 봄은 이미 매화가지 머리에 벌써 와 있었구나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이 시를 읽노라면 내 마음에 이미 봄이 가득함을 느끼면서 행복의 아지랑이가 넘실거림에 푹 빠지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갈까? 만나는 이들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언론에는 분노로 인한 세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두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다. 왜 일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르면서도 정작 그 행복은 멀리 있는 듯하다. “요즘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정기고, 소유의 가사)마냥 행복이 내꺼인 듯 내꺼 아닌듯해서 허탈해 하고 그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봄을 찾아 다니는 이 시를 보라. 울타리 안의 매화 가지엔 벌써 꽃망울이 져 있음에도 시인은 그것도 모르고 봄을 찾아 하루 종일 들과 산으로 쏘다닌다. 봄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한탄했을지 모른다. 왜 나에게는 봄이 오지 않느냐고 불평, 불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지쳐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바로 집 안의 매화 가지에 봄을 알리는 꽃망울이 달려 있는 것 아닌가? 그때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저것이 정녕 내가 그리 찾아 헤매던 봄이란 말인가?”

 

행복도 그런 것 아닐까? 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나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걸어 다니는 얼굴에 도대체 행복이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듯 무표정하다 못해 짜증을 부린다. 그래서 누가 조금만 실수해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본 듯 싶으면 당장 머리띠 두르고 나서려 한다. 배려란 아예 없다. 요즘같은 시대에 타인의 감정을 고려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되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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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가?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사라지고 행복의 재고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왜 사라졌을까? 아니 사라졌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두움이 가득한 마음에 행복의 존재가 보일 리가 없다. 자욱한 안개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듯이 말이다. 이미 봄이 와 있는데도 봄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행복이 이미 내 마음에 있고, 내 옆에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행복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들어야 한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등을 쳐다보지도 말고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한숨을 길게 쉬면서 오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 신선한 공기를 들여 마셔야 한다. 어두움의 안개를 걷어내라는 것이다. 부정의 쓴뿌리를 뱉어 내라는 것이다. 긍정의 마음을, 희망의 마음을 심어주라는 것이다. 침침했던 눈을 비비고 행복이라는 마음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찾아와 있는 행복을 만져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려보라는 것이다

 

행복은 무엇이 더 필요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만 바꾸면 바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어두우면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은 내가 한다. 행복한 인생을 사느냐, 그렇지 못한 삶을 사느냐? 지금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보라! 봄이 이미 찾아와 있지 않은가? 누리라! 그리고 즐겨라!